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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향기

아내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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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9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228쪽 | 140*210*20mm
ISBN13 9791192828244
ISBN10 1192828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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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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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새벽이면 시간이 아주 멈춘 것 같았다. 다만 작은 창을 때리는 바람 소리와 벽을 울리는 황 씨의 코고는 소리에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옆방에서 기척이라도 해야 TV를 볼 텐데……. 황 씨는 밤늦게까지 쏘다니다 점심때가 되어야 일어났다. 일어나기 전에 TV를 켜면 벽을 두드리고 야단했다. 그가 깨어날 때까지 번데기처럼 이불을 돌돌 말고 기다려야 한다. 몸은 탈피도 못 한 번데기처럼 누워있지만, 그래도 마음은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황금나비가 된다. 연희누나가 하늘 저편에 만든 꽃밭에는 어떤 꽃들이 피어있을까? 나는 황금나비가 되어 누나의 꽃밭으로 날아가는 꿈을 꾼다.
---「황금나비」중에서

조심스레 남편 방의 문을 열었다. 미닫이창의 우윳빛 유리문을 통과한 빛이 은은하게 방안을 밝혔다. 커다란 침대 위의 황금빛 이불과 브라운색의 원목장롱과 문갑이 오늘따라 낯설게 보였다. 방안은 붉은빛이 감돌고 공기는 무겁게 압축되어 나를 누르는 것 같았다. 방안에 희미하게 떠도는 남편의 냄새에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기분 탓일까? 창가에 놓여있는 안마의자에서 남편이 일어나며 ‘무엇 때문에 노크도 없이 들어왔어’ 하고 호통을 칠 것 같았다. 아침에 남편이 성질내며 부르던 소리가 아직까지 귓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남편의 호통을 듣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오늘 아침 일은 마음속의 응어리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이십 년을 같이 살아온 남편이었기에 좋은 모습으로 남기를 바랐는데, 이마의 굵은 주름살을 잔뜩 찡그리고 큰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지막으로 남았다. 화를 내는 하회탈과 같은 남편 얼굴이 지워지지 않고 착잡하게 떠올랐다.
---「남편의 분재」중에서

커다란 이삿짐 차와 사다리차가 아파트로 들어왔다. 102동 702호에 들어간다고 했다. 며칠 전에 수리한 집에 오늘 이삿짐이 왔다. 차가 들어온 시간을 경비일지에 적었다. 볼펜을 쥔 손에 따스한 봄볕이 내리비쳤다. 밝은 햇빛이 비치는 손바닥에 깊은 주름이 여럿 보였다. 갈라진 주름은 굴곡진 삶의 흔적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만큼의 세월이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사이에 휴대폰의 화면이 꺼졌다. 휴대폰을 다시 켜고 갤러리에서 제일 선명하게 나온 사진을 찾아 배경화면으로 설정하였다. 이제 휴대폰을 켜면 항상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딸의 모습이 나타나겠지. 애들의 사진을 바라보는 내 가슴이 따스한 봄볕보다 더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경비 정 씨의 하루」중에서

뜨거운 눈물이 발등에 떨어져 정신을 차렸다. 나는 거실에서 잠옷 차림으로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왜, 툭하면 눈물이 나오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나는 휴지를 두 눈금 잘라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머릿속에는 아내와 호야가 산을 넘어가는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어른거렸다. 아내는 젊은 날 달콤한 복숭아 향기와 함께 내 곁에 왔다가 추억만 남기고 떠나갔다. 이제 아내가 아주 가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가슴이 텅 빈 것 같이 허전했다. 식탁 위의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식탁에 앉아 따뜻한 차를 조금씩 들이켰다. 더운 차가 들어가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먼 세상으로 떠나는 아내를 본 것은 꿈결 같았지만 아내가 나에게 남기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내 찻잔을 다 비운 다음 아내의 찻잔도 조금씩 비웠다. 따스한 차와 함께 재스민향이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아내의 향기」중에서

우뚝 솟은 바위에 밝은 햇빛이 내리비췄다. 바위의 그늘진 앞면에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일까? 할아버지를 사진으로도 본 적이 없지만 나는 바위를 할아버지바위라고 이름 지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할아버지바위를 휴대폰에 담아가야지. 근육이 뭉쳐서 다리가 조금 당겼지만 바위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할아버지 바위」중에서

마지막 공판에서 판사는 소영에게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모든 죄는 법에 의거 재판을 통해서만 처벌될 수 있다는 원칙을 판사는 판결문에 담았다. 판결문을 듣는 순간 소영은 왈칵 눈물이 나와 앞이 흐려졌다. 마음 한편으로는 집행유예를 기대했는데……. 눈물을 참고 고개를 들자 법정의 높은 천정에 수진의 얼굴이 보였다. 호스피스 병원에서 본 수척한 수진의 모습이었다. 환자복을 입은 수진은 ‘소영아, 나 때문에 또 네가 힘들게 되었구나. 앞으로는 정말로 너만을 위해 살아라.’ 하고 타이르는 것 같았다. 소영은 죗값을 치르고 나온 뒤 꼭 그러겠다고 약속하며 수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실형이 선고된 판결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비록 실형을 살게 되었어도 소영은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숙제를 마친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숙제를 잘했는지 잘못했는지는 소영이 판단할 몫이 아니다. 단지 소영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성심껏 풀었을 뿐이었다. 소영의 마음은 비바람이 몰아친 뒤의 잔잔한 호수 같은 평온함을 비로소 느꼈다.
---「노란 산수유 꽃이 핀 동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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