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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에서 쓴 군인 남재준이 걸어온 길

옥중에서 쓴 군인 남재준이 걸어온 길

남재준 | 양문 | 2023년 10월 13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3 리뷰 3건 | 판매지수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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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치 top100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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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0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792쪽 | 152*225*40mm
ISBN13 9788994025988
ISBN10 899402598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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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겪은, 우리나라의 소위 진보를 표방하고 있는 사람 중 상당수가 모화사상에 골수까지 찌든 사대주의자들이었는가 하면 김일성을 숭배하는 주체사상파도 있었습니다. 또 오로지 북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눈치를 보면서 북에 사사건건 동조하며 이들을 뒤쫓는 종북 내지 친북 좌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마오쩌둥과 김일성 그리고 붉은 이념은 있었지만 대한민국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야기하는 ‘적폐’는 바로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함으로써 그들이 추종하는 공산화 내지는 소위 민중 민주 사회 건설을 방해한 세력들 즉 ‘반동’들의 호칭인 것입니다.
--- p.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기에 있어야 마땅할 세 가지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 첫째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피 흘려 되찾고 지켜온 이 나라를, 그리고 피 같은 땀과 눈물을 흘려가며 가꾸어 물려주신 이 나라를, 발전시키기는커녕 이토록 혼란스럽게 흘러가는 것을 막지 못함으로서 부모님 세대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둘째는 이제 저 자신 부모 세대가 되어 우리 자식들이 -우리의 젊은이들이- 저마다의 벅찬 꿈을 꾸면서 용기로써 꿈에 도전하고, 인내로써 시련에 맞서 이를 극복하면서 마침내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그러한 세상을 물려주기는커녕, 이토록 젊은이들의 모든 희망을 철저히 짓부수어 오직 암울한 미래만이 펼쳐진 예측 불가능의 시대를 물려주게 되어 자식들 세대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제가 비록 정치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이 나라의 지도적 위치에서 10여 년을 살아온 위치 때문에 오늘을 사는 이 나라의 모든 국민에게 도덕적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 p.17

자질이 부족한 잘못된 장군은 누구보다도 더 나라에 해악을 끼치게 됩니다. 형님께서도 잘 아시듯 임진왜란 당시 23전 23승의 이순신 함대와 단 한 번 싸움에 전멸한 원균 함대의 차이는 오직 지휘관 단 한 사람뿐이며 이것이 바로 장군의 역량과 자질의 중요성입니다. 그런데 일부 정치하는 사람들의 정략적 필요에 따라, 정상적 절차에 의거 선발된 인원을 무효로 하고 재심을 통하여 심사에서 탈락된 장교 4~5명(진급자의 10%에 해당)을 재심하여 진급시킬 경우 군 인사에 대한 신뢰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려, 군의 기초를 제 손으로 허물게 됨으로 저는 이 요구를 일축하였습니다. 만일 제가 이 요구를 한두 명만이라도 들어주었더라면 그들이 말하는 소위 육군 장군 진급 인사 비리 의혹 사건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제가 아무리 우둔하다 하더라도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일국의 운명을 책임지는 장군들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며 더욱이 인사권은 저를 위하여 제가 개인적으로 인심을 쓸 수 있는 사유물도 아닙니다. 군의 진급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헌신 봉사할 수 있는 국가의 간성을 선발하는 공적 관점에서만 공식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제 신념입니다. 다시 태어나 그러한 상황에 다시 처한다 해도 저는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저는 이 요구를 거절할 경우 제게 돌아올 엄청난 불이익을 기꺼이 각오하고 있었던 것인데 누구는 제가 정치력이 부족하고 고지식해서 융통성 없이 일을 처리하여 이 사건을 자초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이익을 위하여 군복을 입은 것이 아니라 제 조국을 위하여 군복을 입은 것이며, 제게 부여된 권한은 저를 위하여 사적 목적으로 행사하라고 나라가 제게 준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제 직분을 수행함으로써 그 책임을 다하라고 준 것입니다. 물론 저도 인간이므로 잠시 번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올가미를 의식하여 제 곤경을 면하고자 인심 쓰듯 장군의 인사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관의 지시를 일축하였고, 그 결과 수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 p.27

제가 대선 출마를 결심하게 된 그 첫 번째 이유는 남북 관계의 극심한 정신적, 물리적 ‘힘’의 불균형이었습니다. 현재 남북한의 재래식 전력은 우리 육군이 북한에 비하여 열세(우선 병력면에서 북한이 우리의 두 배)인 반면, 해·공군은 질적 면에서 다소 우세하므로 재래식 통합 전력 면에서 비록 열세하기는 하나, 최소 방어는 가능한 수준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군이 북한군보다 과학화, 첨단화되어 있으므로 병력의 열세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단견일 뿐입니다. 상대적 전투력이란 단순한 전력의 비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장 환경과 쌍방의 전략 전술에 따라 변화하는 가변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월남에서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 p.42

그 당시 중대전술교범(.FM7-10:Field Manual7-10)은 약 600쪽이 조금 넘는 두꺼운 책(Pocket Book)이었는데 통역 장교들이 미군 교범을 번역해 놓은 한문투성이인 데다가 문장도 어려워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보병을 지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도 3학년 때부터 그 교범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항상 47쪽(차례, 머리말 등 다 빼면 한 10여 쪽 읽은 것에 불과)에서 지루하여 그만두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임관하여 소대장으로 보직된 터에 그 다음 주부터 야외 전술 훈련이라 그 교범을 다시 꺼내 들고 발등에 불 떨어진 기분으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47쪽을 읽고 있을 때 중대 계원이 쫓아와서 대대장님이 급히 찾으신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지?’ 하고 생각하면서 대대장실로 뛰어 내려가니 대대장실에 4개 중대장 및 대대 참모, 주임상사와 인사계들이 모두 모여 토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보더니 대대장님이 “야! 육사생, 야전에서 임시숙영 시 1인 1일 소요되는 물의 양이 얼마야?”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저 없이 “1과1/2.갤론입니다” 하고 답변하였더니 대대장님께서 “아니 저 녀석도 엉터리 아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 FM 7-10 47쪽 제1장 0절 0-0항에 1과1/2갤런으로 나와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눈이 휘둥그레진 대대장님은 당장 교범을 가져오라 하시어 확인하고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아니, 저 녀석 걸어 다니는 FM 아니야?” 하셨습니다. 누가 쪽수와 장, 절에 항까지를 외우고 다니겠습니까? 이게 제 군 생활을 마칠 때까지 멍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 당시 저는 조금 으쓱한 기분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요? 하하, 제가 생도 3학년 때부터 그날까지 작심삼일로 수십 번 읽기 시작한 FM7-10을 항상 47쪽까지만 보다가 집어던졌기 때문에 그것이야말로 우연히 잡은 행운이었습니다.
--- p.105

그렇게 20분 가량을 비행한 후 어느 산봉우리에 저를 내려놓고 헬기는 급상승하여 사라져버려 헬기가 겨우 내릴 수 있을 만큼 나무가 벗겨진 정글 속의 공터에 저만 홀로 남겨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15~6m 정도 거리에서 터뜨린 연막이 아직 오르고 있어 어딘가에 군인이 있겠지 하였으나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 잠시 있으려니 병사 세 명이 올라와서는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이들을 따라 산을 내려가 보니 지휘용 소형 텐트가 처져있고 사병 몇 명과 대위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곳이 제가 보직된 맹호사단 제1연대 3중대의 지휘소였고, 그분이 중대장이셨는데 저를 보더니 거두절미하고 즉시 소대로 가 지휘권을 인수하고 다음 날 새벽 06:00시 이동을 개시하여 10:00시까지 좌표 OO지점에 도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도가 없느냐고 하니까 소대에 가서 소대장 상황판을 보라고 하므로, 솔직하게 동서남북을 분간 못하겠으니, 현 소대 위치의 좌표를 알려달라고 하여 좌표 방안을 받아 적고, 제 휴대품을 중대 CP에 맡긴 후 안내 나왔던 병사들을 따라 소대로 이동하였습니다. 이 병사들은 제가 신임 소대장인 줄 뻔히 알면서도 닭이 개 보듯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소대에 도착해서야 전날 작전에서 우리 소대 출동 인원 35명 중 12명이 전사·상하여 후송되었고 현재 인원 2개 분대(+)로 23명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임 소대장의 피 묻은 상황판과 지도 백, 신호용 플래시, 나침반, 총과 탄띠 등 장구를 인수한 저는 날이 이미 어둑어둑 어두워가고 있었으므로 취임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소대를 2개분대로 재편성하여 사주 방어 형태로 배치하고 매복 호를 구축토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단 한 명이었던 하사 분대장이 여기서 함부로 호 파는 소리를 잘못 내면 몰살당한다면서 호 구축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말없이 제 총에 실탄을 장전하여 방아쇠에 손을 걸고는 가슴을 찌르면서 “내 손에 죽을래, 베트콩 손에 죽을래?” 하였습니다. 그렇게 전쟁터에서의 소대장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 p.153

제가 월남으로부터 귀국한 지 사흘째 되던 날 24기 선배로부터 몇몇 선배가 모여 귀국 환영을 해주려 하니 반드시 사귀는 여자 친구를 대동하고 어디로 나오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 선배(인품도 좋고 합리적이며 명민하였음)와는 생도 시절 무척 가까이 지내던 관계였으므로 군말 없이 나가겠다고 약속한 후 안 가려고 하는 아내(그 당시는 결혼 전)를 협박 반, 잡아끌기 반, 강제로 끌다시피 하여 약속 장소로 나갔습니다. 그곳에서 선배를 만나 따라가 보니 어느 집에 21기부터 24기의 선배 아홉 명이 있었고 이들 모두는 생도 시절 후배들에게 신망이 있었던 선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몰랐지만 점점 이야기의 열기가 무르익어가면서 제 느낌에 생도 시절의 그 순수함보다는 주로 현실적인 대화들이 오가고 하여 잘못 참석했구나 하는 자책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가 자리가 파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 날 저는 전속 부관 때 사단장으로 모시던 김용휴 장군님(육본 군수참모부장, 사전에 약속되어 있었음)을 인사차 방문하여 월남 이야기를 포함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 보직 이야기가 나와서 전날 모 선배가 얼핏 제가 수경사로 보직될 것 같다고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한 것이 생각나서 보직 문제와 함께 그 모임의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김 장군님은 느닷없이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화를 내시면서 “그따위 짓 하려고 육사 나왔느냐. 그러려면 당장 옷을 벗어라”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그때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하셨으나 하나회에 대하여 조금 알고 계셨던 것 아닌지?). 저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생도 3학년 때 그 모임에 참가한 것부터 자초지종을 차분하게 설명 드리니 “그러면 보직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따르겠느냐?” 하시기에 그러겠다고 답변 드렸습니다.
--- p.207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참모님이 “이 바쁜데 무슨 장가냐” 하며 안 내보내 주셨습니다. 이에 저는 거의 단식 농성을 하다시피 하여, 결혼식 전날 밤도 꼬박 새우고 결혼식 당일 여덟 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겨우 사정사정 끝에 2박 3일 휴가를 얻어 부대에서 내준 지프차를 전속력으로 달려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열두 시 결혼식에 늦지 않게 식장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수하자면 결혼식 날 이발과 면도는커녕 세면도 제대로 못한 채로 결혼식에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서서 잤기 때문에 주례사는 하나도 듣지 못하였고, 사회자 소리에 따라 눈 떠야 할 때 잠깐 잠깐 눈만 떴습니다. 그래서 제 결혼사진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플래시 터질 때 눈을 깜박인 것으로 아는데 사실은 가는 코까지 골면서 잔 것(많이 찢어버렸음)이라 눈 뜨고 찍힌 사진이 별로 없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는 “무슨 신혼여행이냐”라며 예식장 앞에 차를 대기시켜 놓을 테니 식 끝나자마자 부대 복귀하라던 참모님을 졸라서 겨우 며칠 말미를 승낙받았던 터라 가까운 곳으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저는 호텔에 도착하는 대로 예쁜 여자 아이 인형 하나를 사주고는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밥 먹는 시간 빼놓고 잠만 자다 온 것이 지금도 아내에게 미안합니다. 그때 여자 아이 인형을 사주어 딸만 둘인 것 같지만 그래도 제 딸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기만 합니다. 저는 2박 3일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 또다시 정신없이 지내다가 약 3개월 후 광주 고등군사반에 입교하였고 이어서 전방 중대장으로 나갔기 때문에 주례 선생님 -장인어른 친지-께 감사 인사도 못 드려 지금까지도 말은 못 하였지만 아내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 p.222

그때 중대장실 안에는 그 병사 앞쪽으로 제 당번병이 미리 들어와 앉아 숫돌에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 병사와 이야기를 시작한 후 약 10여 분쯤 지나서, 당번병이 “중대장님, 이만큼 갈면 되겠습니까?” 하기에, 종이를 쳐보니 잘 베어졌습니다. 당번병에게 이제 되었으니 나가보라고 한 후 나무토막과 종이를 서너 번 베어본 후 그 병사도 내보냈습니다. 그날 저녁 여덟 시 30분쯤 무렵 예의 그 병사가 또 소란을 떨기 시작하자 저는 그 날이 퍼런 칼을 들고 그 병사 앞으로 다가가 “나는 내 손으로 사람을 여럿 죽였는데 너도 사람을 죽여 보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병사가 어리둥절하여 멈칫하는 사이에 “내가 네 신상을 파악하면서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생각해도 네가 죽는 것이 너를 위해서나 너 같은 녀석을 두고 평생 속 썩일 네 부모님들을 위해서나 그리고 우리 중대를 위해서라도 더 나을 것 같다. 내가 중대를 팽개치고 너만 따라다닐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런데 보니, 네 그 대검으로는 날이 무디어 무도 못 자를 것 같아서 낮에 너도 보았지만 이 칼을 갈아둔 거야. 너 도와주려고. 자, 이 칼 받아라” 하고 재촉하자 그 병사는 꿈에도 생각지 못해본 엉뚱한 상황 전개에 당황했습니다. 제가 “칼 받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라고 다그치자, 무릎 꿇고 앉아 빌면서 “다시는 안 그럴 테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네가 약속을 지킬지 안 지킬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으면 부모님 속 썩이지 말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하자 정말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다짐을 하여 알았으니 가서 점호 준비하라고 보냈습니다. 그런 병사들은 조폭의 의리 같은 것이 있어 조폭들이 한 번 형님으로 모시면 끝까지 의리를 지키듯, 마음으로 승복하면 끝까지 진정성 있게 모범적으로 근무합니다. 저는 그 밤의 짧은 행동으로 중대를 완전 장악하였고, 그 병사는 남은 기간 모범적으로 생활하면서 타 병사들을 이끌어, 중대 지휘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p.245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박정희 대통령님의 부산 지역 순시가 있었습니다. 이때 저는 대통령님을 수행하다가 3부두에서 수행 대열로부터 이탈하게 되시는 사령관님을 모시기 위하여 차를 가지고 3부두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왔는지 경호원이라는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 신분증 제시도 없이 다짜고짜 제가 휴대하고 있는 권총을 낚아채며 압수하려 하여 싸움이 붙어 옥신각신하고 있는 사이 대통령 차량 대열이 갑자기 나타나 멈춰 섰습니다. 대통령님은 창문을 내리고 얼굴을 내밀며 손짓으로 저희를 부르시더니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뒤따르던 국방부 장관, 총장, 사령관님 등은 저를 보시더니 얼굴이 굳어지셨는데, 그때만 해도 어렸던 터라 당당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입니다. 그런데 이 경호원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제 권총을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내에서 대한민국 장교가 강제로 무장 해제를 당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 아무 말씀도 없이 물끄러미 저를 쳐다보시던 대통령님께서는 그 경호원에게 “이 장교 말이 맞아, 자네가 잘못 했어” 하시고는 출발하셨습니다. 대통령님 말씀을 들은 장관, 총장, 사령관님의 얼굴이 환해지신 것은 물론입니다.
--- p.294

그 대위는 자기소개 등 개략적인 인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토의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지식은 학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정훈 교육에서 얻은 정도로 “1차 옥포해전, 2차 당포해전, 3차 당항포해전 하며, 한산대첩에서의 학익진, 명량해전에서 12척(13척)으로 적선 334척 격파” 하는 어린이 위인전 내용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위는 각 해전의 배경과 당시 해류 및 해안의 조건, 상대적 전투력, 피아 군함 및 화포의 장단점과 취약점, 적용된 전쟁의 원칙과 지휘 결심의 적절성 및 전투 결과와 교훈 등 완벽한 해전사(海戰史)를 제시하면서 제 의견을 묻고는 자기 견해를 이야기하며 평가를 요구하였습니다.
부산이 가까워지자 저는 솔직하게 “군인으로서 네가 존경스럽고 나 자신이 부끄럽다. 나도 열심히 연구하여 이다음 만나면 보다 전문가다운 토의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어떻게 이순신 장군의 해전사(海戰史)를 연구하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자기는 생도 시절에 이순신 장군의 해전사를 배웠고 이때부터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육사에서는 해·공군 전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저는 그날 받은 충격으로 당장 이순신 장군 관련 서적들을 구입하여 나름대로 읽기 시작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제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습니다.
--- p.342

특전사의 공수 낙하 및 침투 훈련은 오인 사고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사전에 지역 작전 책임 부대에게 반드시 훈련 계획을 통보 및 협조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특전사는 충정부대로, 조금 과장한다면 친위대 격이었는데, 그날은 실무자의 실수였는지 아니면 통상 그렇게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전 통보 없이 저녁 일곱 시경(1/2월광 상태), 원주 서남방에 공수 낙하를 실시하였습니다. 그 지역은 인가가 없는 지역이었으나 이곳으로부터 1km가량 떨어진 동네에 사시는 한 가정주부가 밖을 내다보며 늦은 저녁밥을 먹다가 병사들이 낙하하는 것을 보고 남편을 불렀고, 남편은 바로 이웃 가게로 달려가 사단 상황실 신고 전화로 상황을 알려왔습니다. 사단에서는 바로 그 지역 대대의 5분 대기조 출동과 예비군 소집 및 도주로 차단을 지시한 결과, 특전사 병사들이 군장을 수습하고 출발을 시작할 즈음 현장을 포위하고 정지를 명령하였으나 이에 불응하자 지체 없이 사격(공포탄)하였습니다.
이에 놀란 공수 부대원들은 검문에 응하였고, 제가 팀장을 바꾸어 소속 부대와 인적 사항 및 훈련 계획을 파악 후, 특전사 상황실에 확인을 요구하여 아군으로 최종 확인된 다음 상황을 종료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으로 훈련 성과를 스스로 확인하게 되자 전 장·사병의 사기가 충천하였을 뿐 아니라 훈련도 실전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로 바뀌어 열성적으로 기꺼이 땀을 흘림으로써 점차 싸울 수 있는 부대가 되어갔습니다. 또 예하 부대도 사단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병사들 입에서 “참모님, 북괴 특수 부대가 우리 앞으로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 p.440

실제 지뢰 매설을 해보면 처음 위험하다고 긴장하였던 병사들이 2~3일 작업 후에는 생각하였던 만큼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긴장이 풀어진 상태에서 행동들이 해이해지는데 이러한 심리적 해이가 가장 위험합니다. 저는 예행연습을 평가한 후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매설 작업에 소대를 투입하였습니다. 일체의 통제는 소대장이 하도록 하고 저는 지뢰 매설 병력들의 정 중앙에 위치하여 전 병력에게 저를 주목하도록 한 후, “너희가 작업하는 전 기간 연대장은 지뢰 매설 작업조의 중앙 1보 후방에 위치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고, 지뢰 매설 작업이 종료될 때까지 그 위치를 지켰습니다. 그 위치는 작업조의 어느 누가 실수한다 해도 제가 반드시 부상 또는 사망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지뢰 매설 작업은 계획 일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닷새 만에 성공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 p.510

그런 와중에 하루는 스스로 국회 OO위 소속의 국회의원(?)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인사가 계룡대에 골프 치러 왔다면서 저를 찾아와서는 자기에게 할당된 장군 진급 공석이 몇 석인지 하는 기상천외의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말귀를 못 알아들은 저는 “의원님께 주어진 공석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심해 보였던지 조금쯤은 무시하는 투로 부장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내용을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하면서 위원장은 0석 누구는 0석 하는 식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다 듣고 난 저는 “아~ 그 문제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면서 “한 석도 없습니다”라고 하자 얼굴이 시퍼렇게 되면서 “그게 무슨 소리냐,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느냐”라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연하게 “내가 부임한 날부터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는 “국가와 국민의 안위와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장군의 직책이 당신 눈에는 어물전에서 파는 꼴뚜기로밖에 보이지 않습니까? 오늘 당신 이야기를 한 자도 빠짐없이 언론에 알리겠습니다”라고 협박(?)하여 후환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 p.625

제가 부임하고 나서 한 달 조금 못 되어 연합사령관 교체가 있었습니다. 신임 사령관 라포트(Leon J. LaPorte) 장군은, 임관은 저보다 1년 먼저이지만 대장 진급은 제가 1개월 빨라 대장 선임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취임식 행사가 끝나자 전임 슈워츠 장군을 전송한 저는 바로 사령관실로 들어가 라포트 장군과 마주 앉아 “장군이 알고 있듯 대장은 내가 선임입니다” 하고 이야기하자 라포트 장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습니다. 제가 파악한 라포트 장군은 인간관계에서 그렇게 능수능란한 수단꾼이 아니라 진솔한 인품에 겸손이 몸에 밴, 예절 바른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신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래서인지 부사령관인 제가 선임 대장이라는 데 대하여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일언이폐지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라포트 장군이 고민하고 있는 핵심을 찌른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제가 “그러나 사령관은 당신 라포트 장군이고 나는 부사령관이다. 나는 군인이므로 전·평시 나의 직분인 부사령관의 직책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며 부사령관으로서 최선을 다하여 사령관을 보좌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자 라포트 장군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면서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그 2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에 저와 라포트 장군은 평생의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 p.677

지나온 과거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남은 기간 나도 가장으로서 아내에게, 자식들에게 무엇인가 하나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함께 갈 수는 없지만 아내가 아이들 데리고 3박 4일 정도 휴양을 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생각해내고는 부관을 불러 담당 장교에게 휴양소를 예약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부관이 들어와서는- 저는 가족만의 이용도 가능하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총장님 부임 이후 규정이 바뀌어 본인이 가지 않고 가족만 가는 것은 휴양소 이용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휴양소 관리 규정은 인사참모부장 전결). 할 말이 없어진 제가 인사참모부장을 호출하자 중령 실무자를 대동하고 제 방으로 들어왔는데, 그 실무자는 “휴양 시설 등 군 복지 시설들의 혜택이 고르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군 복지 시설 사용 실태를 점검해보니 수용 능력이 소요에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서, 휴양 시설 이용이 현역 및 예비역의 장군 등 고급 장교들에게 편중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이용한 시설의 70% 가량이 당사자들이 아닌 제3자들의 이용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군 휴양시설의 상당수가 개인 별장처럼 사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폐단을 근절토록 본인이 가족을 동반하지 않을 경우에는 휴양소 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수정하였고 예약도 공평을 기하기 위하여 전산 예약으로 제도를 수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총장님께서도 휴가를 가시지 않는 한 군 휴양소 이용은 하실 수 없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할 말이 없어진 저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조 중령! 내가 자네의 참모총장이라는 것이 정말로 자랑스럽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p.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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