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이 정부 수립 직후 제시한 이념적 지표는 반공주의를 기본으로 한 일민주의로 설명된다. 일민주의는 이승만과 양우정, 안호상 등 그의 추종자들이 제시한 정치이념이다. ‘하나의 국민(一民)’으로 대동단결해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일민주의는 반공주의가 본격 등장하기 앞서 정부 수립 직후의 시대 상황에서 내세운 과도적인 이데올로기다.
----「01 제1공화국 초기 공보 활동」중에서
정부 공식발표와는 달리, 이승만 대통령은 각료나 국회의장과 대법원장 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그날 새벽 4시 서울역을 출발해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그런데 27일 저녁 9시 대전으로 피난을 간 이승만 대통령이 특별 담화를 녹음해 방송으로 발표했다. “서울 시민은 대통령과 함께 서울에 남아서 서울을 사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방송으로 서울시민들은 대통령이 서울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6월 28일 새벽 2시 넘어 한강다리가 폭파되었고, 28일 새벽 1시에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서울에 진입해 그날 오후 5시 완전 점령했다. 이처럼 국방부 정훈국과 공보처의 발표가 사실과 너무나 다르고, 대통령의 담화 역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는 현실과 달라 국민은 정부 발표를 신뢰하기 어려웠다.
----「04 전쟁 보도」중에서
전쟁 기간 서울에서 발행하던 신문들이 정상적으로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고, 인적, 물적으로 상당한 피해를 받아 고생한 반면, 전쟁이 시작된 후 3년 가까이 임시 수도였던 부산의 신문들은 갑작스러운 전쟁이 오히려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기간 주요 신문들의 운영과 변화를 살펴본다.
----「05 신문의 수난과 임시 수도 부산 언론의 발전」중에서
전쟁 기간 중앙방송은 유엔군총사령부 심리전부의 감독을 받으며 심리전 매체로 활용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심리전 방송으로 활용하기 위해 VUNC의 네트워크에 편입해 VUNC와 VOA 한국어 방송을 중계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황 보도에서 왜곡, 허위사실 보도가 문제가 되자, 유엔군총사령부 심리전부의 KBS 파견대가 방송 내용을 검열하고, 뉴스와 뉴스 해설을 직접 제작하는 방식으로 감독했다.
----「06 국영 중앙방송 운영과 프로그램」중에서
전쟁 기간 잡지가 크게 인기를 끈 이유는 5장에서 살펴본 부산 지역 신문의 인기와 공통되는 사항들이 있다. 우선 피난민들이 부산과 대구로 몰리면서 이 지역에 인구가 크게 증가한 것이다. 여기에는 어른, 학생, 어린이들이 모두 포함되었다. 또한 피난민 가운데는 아동문학가를 비롯해 시인, 소설가, 언론인, 화가, 만화가 등 글을 쓰고, 그림과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인력들이 많았다. 특히 대중잡지나 청소년 잡지의 필진 대부분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섭외하기 어려웠을 각계의 저명한 인물들이 참여하면서 글의 주제와 내용이 충실했다.
----「07 출판 · 잡지」중에서
VUNC는 일본과 한국의 방송 시설을 이용해 남북한 주민과 군인 그리고 1951년 이후에는 중국 군인과 주민도 대상으로 해 방송을 통한 심리전을 펴나갔다. 이 두 방송은 미국 정부의 대외 정책 수행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선전 매체로서 미국의 대한 정책 아래 전개된 방송 활동이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갈등 상황에 미국 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하거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할 경우 이 방송들이 그 통로가 되기도 했다.
----「08 미국의 대한 방송과 심리전」중에서
삐라는 “들리지 않던 총성”이고 “종이폭탄”이며, “심리전의 보병”으로서 미국 육군부 장관 페이스(Pace)가 “적을 삐라에 파묻어 버릴 것”을 명령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전쟁수단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3일째 되던 6월 28일 미 극동군 심리전과에서 무려 1176만 장이나 되는 엄청난 분량의 삐라를 처음 제작, 살포했다. 이어 그해 10월 말에 1억 장, 1951년 1월 26일에 2억 장을 돌파했으며, 11월 말까지 8억 장을 넘어섰고, 전쟁 발발에서 휴전까지 25억 장 이상의 삐라를 살포했다.
----「09 삐라 심리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