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Astra Per Aspera(진흙탕을 헤치고 별까지). 가난, 전쟁, 분단, 보잘것없는 기술과 빈한한 천연자원까지, 가진 거라곤 결핍이 전부였던 대한민국의 자동차산업이 오늘날 거두고 있는 성공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문장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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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대를 향한 한국 자동차의 첫 기항지가 독일, 미국, 일본이 아니라 조금은 생소했던 나라 이탈리아였던 것에 대해 두고두고 큰 행운이라 여기던 것도 이런 복합적인 매력들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이탈리아는 이를테면 잘 달궈진 프라이팬 같은 나라였다. 그 뜨거운 열정 위에서 다양한 문화권의 기술, 학문, 사상, 예술이 융합되며 미학적으로 재창조되는 공간이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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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 회장은 그 자리에서 현대자동차의 고유모델 개발이 “분명히 불가능한 것”이라 단언했다. 다른 국내외 전문가들도 한국의 산업 환경이 세계 수준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상황에서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는 목표라고 폄하했다. 같은 시각, 고유모델 없이는 미래도 없다고 생각한 정 회장은 이미 호랑이 굴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 미쓰비시 자동차의 구보 도미오 회장과 기본적인 양해각서를 주고받는 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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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이탈리아인들은 일하는 모습이 우리와 사뭇 달랐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척 여유 있게 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주 빠른 시간 내에, 그것도 확실히 작업이 마무리가 되고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수제품의 수준은 손으로 두드려 만든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했다. 땀과 기름에 전 작업복 차림에도 그들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 명성을 떨쳐온 카로체리아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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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 프로젝트는 사실상 기술의 세계에는 결코 도전정신과 근면함만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단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하는 각성의 출발점이었다. 적당히 넘긴 과정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교훈을 책이나 문서가 아닌 몸으로 체감하는 귀중한 경험이었고, 끝이 없는 자동차 기술의 발전에서 그 각성은 계속해서 현재 진행형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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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포니는 중동 사하라 사막을 통과하고, 런던 피카디리 광장을 거친 뒤에, 중남미 안데스 산맥을 넘어, 지금 막 캐나다에 도착했습니다.” 포니2는 엄밀히 따지면 원작의 성공 신화를 연장하기 위해 준비한 모델이지만 첫째 못지않은 대성공으로 현대자동차 모두에게 큰 기쁨을 안겨준 효자 상품이다. 포니2는 캐나다 진출을 목전에 둔 1983년 광고 캠페인을 통해 먼저 현지인들에게 선을 보였는데 그해 캐나다 최우수 광고상을 수상할 만큼 큰 임팩트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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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革新)의 사전적 정의는 ‘묵은 관습과 방법을 완전히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살가죽을 벗겨 새 살이 돋게 한다는 원래의 뜻을 이해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더 실감이 난다. 포니 엑셀의 짧았던 성공, 그리고 몇 배는 더 길었던 좌절의 시간은 현대자동차 전반의 근본적인 혁신을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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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그십(flag-ship), 우리말로 기함은 해군 함대 제독이 승선하는 대장선을 일컫는다. 자동차 회사들 역시 메르세데스 벤츠의 S-클래스, BMW 7시리즈, 재규어 XJ처럼 자사 최고의 성능과 기술을 집약한 플래그십 모델, 이른바 ‘회장님 차’로 자존심 대결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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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J-카 프로젝트의 첫 번째 타자인 엘란트라 개발에 착수할 무렵 현대자동차의 생산 차종은 소형차 포니 엑셀과 중형차 스텔라 단 두 종뿐이었다. 대형차인 포드 그라나다는 단산 수순을 밟고 있었다. 따라서 모터라이제이션 시대의 도래와 함께 가족을 위해 생애 첫 차를 구입하려는 젊은 고객들을 위해 너무 작지도, 또 너무 크지도 않은 크기의 틈새 차종이 필요했다.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 C세그먼트로도 불리는 이 영역의 차종들은 첫 차에 대한 만족감이 이후 더 높은 차급을 구매할 때 브랜드 충성도로 발휘되는 경우가 많아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들도 모두 각별히 공들여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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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여러 인터뷰에서 단골로 받았던 질문은 그간 개발한 차종 중에 가장 기억에 남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차를 소개해달라는 것이다. 사실 내가 현대자동차에서 개발했던 35개 차종 모두가 소중하고 기억이 또렷한데, 그중에서도 준중형의 대명사가 된 J-2 프로젝트 ‘아반떼’는 좀 더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프로젝트이다. 엔진, 변속기, 플랫폼, 스타일링과 설계까지 모두를 우리 손으로 진행한 명실상부 한국 고유의 완전한 독자 개발 모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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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자동차를 인수한 정몽구 회장은 가장 먼저 소하리에 있던 연구소를 남양연구소로 통폐합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연구소를 일원화해 설계와 개발에 필요한 중복 투자를 막는 게 급선무였다. 당시 우리가 내부적으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통합 초기인 1999년부터 2004년까지만 따져도 연구개발 부문의 투자 비용 절감액이 7억 달러, 플랫폼 공용화를 통해서는 20억 달러, 파워트레인 통합으로 인한 절감 효과는 8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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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재진출의 선봉은 EF 쏘나타였다.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BMW 5시리즈와 비교 시승한 뒤에 “현대차가 EF 쏘나타의 가격을 왜 그렇게 낮게 책정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5,000달러는 더 올려도 된다”면서 몰라보게 달라진 현대자동차의 성능과 품질을 호평했다. 자동차 소비자 만족도 조사에서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JD 파워의 평가도 계속해서 상승했다. 정몽구 회장은 한 발 더 나아가 ‘10년 10만 마일 파워트레인 보증’이란 회심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미국 현지에서는 현대 어드밴티지(Hyundai Advantage)라고 불렸다. 당시 대부분의 메이저 회사들은 3년 3만 마일, 많아도 5년 5만 마일 이상의 보증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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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슬픔은 늘 함께 다니는 모양이다. 그해 3월 21일, 정주영 회장이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먼 길을 떠나는 그를 위해 정세영 회장 시절부터 미리 제작해둔 에쿠스 리무진 영구차에 밤을 새워 영정을 직접 걸었다. 1,001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북한의 고향으로 향하는 정주영 회장을 위해서도 트럭을 개조했었다. 왜 1,000마리가 아니고 1,001마리냐는 물음에 그는 “1,000은 끝나는 수지만 1,001은 이어지는 수”라 말했다. 정주영 회장이 내게 묻곤 했다. “이거 되는 거야?” 한국 자동차 개발의 살아 있는 역사가 저물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기술 개발의 고단함 속에서도 언제나 마음 편히 뉘일 수 있는 언덕 같던 존재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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