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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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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1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432쪽 | 135*200*30mm
ISBN13 9791198288233
ISBN10 11982882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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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사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로 나가 서랍장에서 65 리스트와 필기구를 꺼냈다. 소녀의 옆에 앉아 방바닥에 메모지를 펼쳤다. “잘 보렴. 이건 살아 있을 때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할 일을 적는 리스트야.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성스러운 맹세지.”
* 돈 잘 버는 전문직에 종사하기
* 많이 벌면 은퇴해서 우아하게 살기
* 번 돈은 예순다섯 살까지 남김없이 쓰기
무라사키는 필기구를 쥐고 마지막 항목을 지웠다. 아이가 글을 몰라도 이해할 수 있게 소리 내면서 여백에 이렇게 적었다. ‘사쿠라에게 돈 버는 전문 기술을 전수하기’ 메모지를 가리키며 빙긋이 웃었다. “이 전문 기술은 도둑질이 아니란다. 내가 하는 일도 불법이긴 하지만, 손님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사례금까지 두둑이 받는 일이야.” 그 녀석에게 다시 전화해서 어제의 그 의뢰를 수락해야겠다. 노병은 다시 전선으로 돌아간다. 신병에게 전투가 무엇인지 보여줘야 할 사명이 생겼으니.
---「예순다섯 데스」중에서

어디로 가야 하나. 이렇게 도망치는 게 맞을까. 무라사키는 앞서가는 사쿠라를 따라 밤거리를 달리면서도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일단 영장이 나온 이상 자베르 경감을 뿌리치고 도망가기란 쉽지 않다. 차라리 얌전히 구속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편이 나으려나. 정식적인 양자결연 절차도 밟았겠다, 유괴라는 죄목은 순전히 트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돈을 들여 좋은 변호사를 선임하면. 안 돼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재판을 기다린다니. 지금은 그만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까지 저 아이 곁에 있어야 한다. 맹세하지 않았던가.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예순다섯 데스」중에서

“금지한 이유가 궁금해. 혹시 수학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으음, 그건 말이지. 이야기하자면 좀 길어.”
쿠르트는 작업하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이 나라도 옛날에는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갔다. 심지어 왕을 보좌하며 국정을 맡아보는 대신들 사이에서도 수학을 싫어하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 그러던 어느 날 국정 회의에서 수학을 완전히 추방하자는 법안이 제출되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은 너무 따분하고 진절머리가 나고 들여다보기도 싫은데, 그런 수학을 아예 없애버린다면 이 나라가 평화로워지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당시 재상은 수학을 배제하면 국정이 바로 서지 않을 것이라고 반론을 펼쳤다. 당장 나라의 세수는 누가 계산하냐고 말이다. 그러자 고결한 왕이 나섰다. 짐이 민초들의 무거운 짐을 떠맡겠노라.
---「이세계 수학」중에서

에미는 관중을 돌아보았다.
“거기, 당신. 가게의 회계, 직접 관리해보고 싶지 않아요?”
“아, 나 말이오?” 가게 주인처럼 앞치마를 두른 남자는 놀랐는지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소. 전부터 그런 생각은 했지. 매입에 얼마를 쓰고 돈은 얼마가 들어오는지 직접 파악할 수 있다면 가게를 어떻게 운영할지 더 연구해볼 텐데 말이오.” 그러자 그 말을 계기로 곳곳에서 의견이 나왔다. “우리도 그래. 직접 하고 싶어.”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의 수가 날씨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궁금해.” “우리는 농부인데 연도별 비료량과 수확량의 관계를 알고 싶어. 이것도 수학인가?” 예상대로 수요가 있었다. 에미는 가면 속에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왕이 불안해하며 말했다. “그러나 짐은 암기하는 수학밖에 모른다. 짐에게 수학을 알려준 재상도 그렇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에미는 교수대 아래에 서 있는 죄인들을 자신만만하게 가리켰다. “저기에 좋은 교사들이 있습니다. 암기가 필요 없는 재미있는 수학을 잘 아는 자들입니다.” 소년 왕은 눈을 크게 떴다. “재밌는가? 수학이?” 에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요. 정말 재밌답니다.”
---「이세계 수학」중에서

잠깐만 생각해보자. 홈 AI로 피자를 주문하고 난 그녀는 포동포동한 팔로 팔짱을 꼈다. 다이어트 왕 결정전이라고 했는데 어떤 방식으로 우승자를 가릴까. 정부 공문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어봤지만, 경기 방식이나 규칙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대신 문서 끄트머리에서 아까는 못 보고 지나쳤던 문구를 발견했다. 하나. 참가 자격을 얻은 당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사퇴할 수 없다. 둘. 경기에서 진 사람은 무조건 죽는다. 헉! 이게 뭐야. 대체 무슨 소리람. 장난 아니게 무서운데요. 다시 읽어봤다. 정말로 ‘경기에서 진 사람은 무조건 죽는다’라고 적혀 있었다. 거짓말이겠지.
---「살 좀 찌면 안 되나요」중에서

“그건 저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구레나이님의 소원이라고 해도.” 아이는 구급상자를 끌어안고 신음했다. 헤드 드레스의 하얀 망사가 흔들리면서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가 앞으로 사르륵 흘러내린다. 노을빛을 받아 반짝인다. 마치 로코코 시대의 초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당신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죄송합니다. 애초에 제 능력이 부족했던 탓에 이런 최악의 사태를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아. 아이 탓이 아니야. 아이는 잘못한 게 없어. 그러니까 사과하지 마.”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최강의 경호원인 프렌드 AI가 붙어 있는데 왜 저 아이는 감염되었을까.
---「슈뢰딩거의 소녀」중에서

아이는 “세 마리”라고 외치고 쇠지레를 Z의 왼쪽 눈에 때려 박았다. 그 반동으로 인조 속눈썹이 날아가서 벽에 달라붙었다. 쇠지레를 비틀어 몇 초간 기다린다. 상대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춘 것을 확인한다. 끝났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이! 살려줘!” 사용자의 비명이 들려서 뒤돌아봤다. 구레나이는 층계참 구석에서 공포에 질린 채 굳어 있다. 그 옆에서는 무사히 있어야 할 노파가 눈을 뒤집어 흰자를 드러낸 채 침을 질질 흘리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다. 증상 발현이 느린 감염자였다니. 당신은 침을 꿀꺽 삼킨다.
---「슈뢰딩거의 소녀」중에서

그의 손은 사요의 가슴 한가운데에 있는 손바닥 모양의 문신을 정확히 가리켰다. 사요는 두 눈을 감고 오른손으로 자기문신을 만졌다. 받아들이겠다는 신호로 보였다. 그제야 폴더가 입을 뗐다. “이제 시작되고 말았으니 설명해도 괜찮겠죠. 새로운 배를 만들 때는 신에게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가슴에 새겨진 손바닥 문신은 신을 위해 준비된 제물이라는 증표입니다.” 제물의 증표라고? 사요가, 왜? 요이치는 충격이 큰 나머지 휘청거렸다. 그 몸을 뒤에서 고지마가 받쳐주었다. “괜찮냐?” 그러나 요이치는 말없이 청년의 손을 뿌리쳤다. 이 사람은 사요를 촬영할 작정이다. 그 가련한 모습을 거침없이 카메라에 담아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노출하려 한다. 그럴 목적으로 이 섬에 왔으니까. 요이치는 인류학자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폴더 씨, 통역 좀 해주세요.” 사요 모녀와 장로 사이에 끼어들어 소녀의 손을 잡았다. “사요, 내가 보트를 부를게. 같이 이 섬을 떠나자.”
---「펜로즈의 처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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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소녀』는 패기가 넘치는 소설집이다. 때로 뻔뻔스러울 정도로 대담하고, “왜 안 돼?” 하고 물으며 가볍게 선을 넘는다. 게다가 빠르고 재미있다. 다세계 해석 가설이나 드레이크 방정식을 소재로 소설을 쓰라는 주문은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엄두가 안 나는 일일 테다. 작가는 그 작업을 과감하게, 종종 현란하게 요술처럼 해낸다. 작가는 고령 사회의 해법으로 다들 일찍 죽자는 법안이 발의되는 미래를 꽤 괜찮아 보이게 그리기도 한다. 비만 차별을 비판하는 듯하면서도 가시를 남겨둔다.
- 장강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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