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듣는 동안 궁금해졌다. 대체 그동안 어떤 책을 읽었기에 교과서를 어려워하는지 말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이는 문학 위주의 이야기책을 주로 읽어왔다. 《아몬드》(미디어창비), 《페인트》(창비), 《학교 안에서》(사계절), 《달러구트 꿈 백화점》(팩토리나인),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인플루엔셜(주)〕,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문학동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현대문학) 등등이 친구 딸이 지난 6개월 동안 읽은 책이다. 하나같이 좋은 책이지만 사회, 과학, 국어 비문학 지문을 풀 때 도움이 될 만한 책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제야 책을 많이 읽었는데도 성적이 떨어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상담하다 보면 이런 경우를 자주 만난다. 책을 많이 읽었는데도 성적이 나오지 않은 아이들은 대개 문학 위주의 독서를 했다.
독서가 성적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 퍼지면서 부모들은 무조건 많이 읽으면 공부도 잘하겠지 생각한다. 이런 부모의 소망과는 달리 비문학 독서를 등한히 하고 이야기책 위주의 독서 습관을 갖고 있는 경우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성적이 조금씩 하락한다. 바뀐 성적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일명 책만 읽다 손해 보는 아이들이다. 관건은 무조건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공든 탑’이 더 굳건해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pp.21-22
가끔 학부모들은 다독이 좋냐, 정독이 좋냐 물어본다. 기본적으로 어린 시절에는 여러 책을 두루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줄거리만 꿰는 건 곤란하지만 그런 나쁜 습관이 없다면 어릴 때는 다독을 권한다. 많이 읽다 보면 좋은 책을 보는 안목도 생기고, 배경지식도 갖출 수 있다. 다독은 다양한 세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도구이다.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비판적인 사고도 불가능하다. 알아야 생각할 수 있고,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초등은 다독을 할 수 있는 좋은 시기이다. 다독으로 독서의 기본기를 다지고,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이면 정독할 만한 가치 있는 책을 찾아 천천히 음미해가면서, 밑줄도 긋고, 좋은 구절은 따로 메모하면서 읽는 것이 좋다. 이 시기가 지나면 학교 공부에 치여서 웬만하면 책 읽을 시간을 내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 현실이다.
---pp.127-128
자식 교육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다. 부모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잘되는 아이가 있고, 온갖 정성을 들여도 안 되는 아이도 있다. 이런 변수 때문에 단정적으로 ‘이거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책 읽는 아이들의 부모는 책 읽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따로 읽으라고 하기보다 그냥 부모가 읽으니 옆에서 따라 읽는다. 부모의 책을 대하는 태도는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전해진다.
내 경우도 그렇다. 우리 아버지는 책 읽는 아버지였다. 책이 귀하던 시절, 우리 집은 책이 많았다. 일요일이면 아버지는 종일 책을 읽었고, 가끔은 밤새우기도 했다. 종종 책을 읽어주며 우리의 생각을 묻기도 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내게 책 읽기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했다. 클릭 몇 번이면 얼마든지 재미있는 영상을 볼 수 있다. AI는 알고리즘에 의해 취향 저격 동영상까지 찾아준다. 문제는 영상에 많이 노출된 아이들은 책 읽는 일을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영상은 메시지를 즉각적으로 전달하지만, 책은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 그냥 글자를 읽는 게 아니라 내용을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추론해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즉, 고도의 정신적인 활동을 요구한다.
그래서 영상에 익숙한 아이들은 깊은 사유가 힘들다. 그들에게 고도의 정신적 활동을 요구하는 책 읽기는 재미없고, 지루하기만 할 뿐이다. 문제는 영상을 많이 접할수록 뇌는 본능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피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책과 점점 멀어진다. 그렇게 되면 안 읽는 사람은 더 안 읽고, 읽는 사람은 더 많이 읽는 독서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강화된다.
---pp.238-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