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희는 깍두기볶음밥을 먹으며 난데없이 하얗게 웃었다.
---「첫문장」중에서
붉은빛과 감청색은 강렬했다. 비로소 율희는 묘하게도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영혼이 해골인간의 얼굴에 달라붙어 세상을 헤매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율희는 이를테면 그런 해골인간 인형에게조차 영혼을 불어넣으려 생각하고 있고, 그때마다 사춘기 문학소녀처럼 설레고 감성이 짜릿하게 터져버릴 것만 같다.
--- p.12
마지막 인사조차 어찌해야 할지 모르며, 자신에게 찾아온 슬픔조차 슬픔을 알지 못했다. 어찌어찌 화장된 딸의 한줌 재를, 부들부들 떨며 딸이 감동해 하던 줄포 노을바다 위에 겨우 뿌리고, 49재를 지내면서도 왜, 어떻게 딸이 죽어갔는지를 알 수 없어, 억장이 미어졌다. 구천에 떠돌고 있을 딸, 어떻게든 잘 보내줘야지, 어미 심정으로 날밤을 새우며 문득 생각해낸 것이 삼보일배다.
--- p.18
“이 세상은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조차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란다.”
--- p.29
혁진에게 실존주의는 젊은 날의 화두였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물론이거니와 실존주의,라는 말은 나이를 먹어가고 도피처 삼은 시골로 귀향한 뒤로 점차 잊혀지고 있었으나 그런 와중에도 혁진은 늘 삶의 실존,이라는 안개강을 건너는 뱃사공,의 느낌이었다.
--- p.33
“그랬더니?”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멀뚱멀뚱만 하고 아무 대답 않더라고.” 소주 한 잔을 들이켜며 한참을 깊이 생각하던 혁진이 말했다. “나도 그런 비슷한 걸 느낀 적이 많은데, 그 양반은 일상범,이야.” 단호했다. “일상범?”
--- p.45
한 보름 전께였다. “우리 아들한티도 좋다고 그러더라고.” 우리 아들한테도?, 죽은 딸 이야기 막바지에 이 말을 들은 서영은 갑자기 머리가 싸해졌고,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다시 뜨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했다. 별 생각 없이 말을 내뱉다 냉담해진 서영의 태도에 율지댁은 아차 싶었는지 슬그머니 그려 그럼, 하면서 돌아갔다.
--- p.69
“세상 바뀐 걸, 여어태 모르시나?” “···” 이때 뭔 일인가 싶어 현관문 쪽으로 다가온 손님이, “왜 그래?” “음식 배달은 임무가 아니라는데?” “뭐여, 이 새끼가? 너 이름 뭐냐. 야, 경호팀장 당장 불러, 엉?” 다급하게 불려 온 경호팀장에게 삿대질하며 닦달하는 사이 주인은 식당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손님은 소파에 되돌아와 다리를 쫙 벌려 앉았다. “야, 저놈 네가 처리해라, 감히 날 모멸해?” “모멸이라뇨, 임무의 준칙을 잘 지키는 거지.” “그게 나한텐 모멸이다 임마, 엉?”
--- p.106
주인은 떼말벌에 기습공격 당하듯 피를 나눈 주군에게 된통 허를 찔렸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다. 분명 가오나시 화법을 놀리며 자기를 까는 것도 아닌데 넌 하수야!, 넌 거기까지냐?, 이 말이 비틀어져 뇌리를 급자극하고, 작정해 까는 것보다 더 심하게 까이고 있다는 느낌 아닌 느낌이 찰나의 순간에, 천둥 번개로 내리쳤다. 창조? 파괴? 이 키워드의 정확한 의미를 순발력만으로 직감할 일이 아니었다. 당장은 이 찰나의 순간을 모면하는 게 우선이었다. 허 찔린 사색(死色), 들키지 않게. 즉각 낄,낄,낄!, 특유의 깐죽 웃음이 섞이는 가오나시 화법의 변통으로, 주인은 자신과 화해했다. 아무일 없다는 듯이.
--- p.120
기분 더러운 악몽이었다. 투표하던 날 밤, 일찌감치 소주 두 병씩이나 까고 그대로 잠을 청했다. 불안했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찬탈당할 악독한 현실,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엄습했다. 그 염려가 웃프공 악몽으로 이어진 것이다. 웃프공, 웃기고도 슬프면서 공포스러운. 악몽은 하나하나 현실이 되고 있다. 지독한 현실이다. 혁진은 송시열의 초상을 뚫고 한걸음 한걸음 곧은 길로 나아간다. 다른 길이 없다.
--- p.122
“들킬 일이야 없겠습니다만, 제 마음의 양심이 들킬까 봐 혼란스럽습니다.” “양심? 국가 중대사에 개인의 감정을 섞는 일은 옳지 않아, 공무원이. 그 사람들, 내 고향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내가 슬퍼해야 하나? 내게 영혼이, 너거 젊은 사람들 표현대로, 1g이라도 있다면 그 1g의 영혼가루는 슬픔의 바다에 불태우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슬픔이 드러나지 않도록 영혼구멍을 막는 데 써야 하는 거야. 대한민국을 위해.”
--- p.161
“놀러 가서 죽은 사람들을 왜 국가가 책임지냐는 비난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이 말은 차마 제가 하지 못했는데요, 딸년 굥 찍어 놓고 굥한테 잘도 죽었다,고 조롱당하는 일이에요. 종루에 올라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려면 딸년의 종소리를 울려주어야 하잖아요. 딸년이 굥 찍었다는 걸 말하지 말아야 하나요?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어도,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할지, 가려내야 해요?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수록 세상은 저에게 손가락질하면서 달려들 게 뻔해요.”
--- p.174
사회적 의례,라는 고급진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개무시, 개죽음,이라는 정제되지 않은 말조차 서영의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오자 혁진은 내심 놀랬다. 서영의 입이 거칠어졌다기보다는 사태의 본질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느껴졌다. 서영의 실존적 본능이 예감되었다.
--- p.180
“오, 맙소사! 무서운 일이구나. 너희들은 그러니까 몸뚱아리만 있는 혼체(魂體)로구나, 혼체. 인간계에서 이름을 제거했다고 혼체 자신들의 이름을 잃어버리다니! 이름은 망자와 산자를 연결하는 끈이 아니더냐. 인간은 탯줄로 태어나 기뻐하고 이름으로 죽어 애도하는 법이다.”
--- p.189
알아도 대충 아는 게 아니라 세밀하게 알아야 하고요. 진실은 부지런해야 알 수 있고 용기가 있어야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겉으로 보이는 느낌만 가지고 판단하는 게 얼마나 편협되고 위험할 수 있는지···”
--- p.219
“이 세상이 말이야, 같은 디서 살아도 안 보이는 사람헌티는 안보이는 모양여. 땅속이서 나는 찌러렁 소리 있잖여? 그 소리도 다 지렁이 노랫소리여. 노래도 부르고 독도 쏘고 히서 지 살길 찾고, 그러는 겝여. 찍소리 못허고 땅이서 기어댕기면서 나약허게 사는 것 같여도 안그려야? 관심 가지고 잘 살펴보믄 다른 시상이 있당게.”
--- p.227
“정말 중요한 생존수단은 정치적인 눈이에요, 세상을 바라보는 정치적인 눈. 그 눈마저 없다면 아주 병신처럼 살아갈 거예요. 저에게 정치적인 눈은 좌빨의 눈이 아니고 상식이 판단해주는 평범한 눈입니다. 이러한 눈이 없다면 그게 어디 사람일까요, 개돼지지! 저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달팽이처럼 굴러다니며. 그 나침반이 곧 정치적인 눈이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달팽이처럼 굴러왔어요.”
--- p.305
세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축 늘어지는 것 같았는데, 그 뒤론 저도 아무런 기억이 안 나요.”
“그럼 우리 율희가 넘어져 밟혀서가 아니라 서 있는 상태에서 그랬다는 말이니?”
--- p.307
인간의 존엄성이 먹혀들지 않는 이 지독한 현실을 악용하여 탄생한 정부죠. 공포정치는 덤이고요. 어떤 유명작가는 각자도생하라고 그래요. 맞아요, 각자도생해야죠. 근데 하나마나한 소리 아니어요? 잠시만 안타까워하는 감성의 동정심을 넘어, 퍼즐을 연결하며 참사에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죠. 누구에게 일어난 일은 누구에게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공명의 감정을, 아니 이 악마와도 같은 공멸의 감정을, 도대체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나요?”
--- p.319
“아니다. 딸년은 이미 죽어버렸고, 내가 누군지를 정작 딸에게 말해준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대화를 많이 나눴으면서도, 그게 참 슬프네요. 나와 딸은, 도대체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거죠?”
--- p.329
“어째 이런 일이, 충격이다. 정말 좁은 곳이구나.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곳이 이토록 좁은 공간이었다니, 우리의 지독한 현실이 너무나 잔인했구나! 슬퍼하지 않으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저들은 힐난하더라. 그래서 절규를 했는데도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일까. 생각해보니 그렇구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아무말도 하지 않았겠구나. 난, 그렇게 영원히. 난, 너를 잃고나서야 비로소 말을 얻게 되는구나. 기억하련다. 나 윤서영은 이제, 아니 이제야 사랑하는 내 딸 함율희 너에게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을 하련다, 똑똑히!···”
--- p.338
칼로 물베기 하는 게 부부싸움이라는 말을 빛나게 하듯 한바탕 싸우고서도 뜨겁게 혀감기를 나누던 곳도 마당 한 켠에 자리잡은 파초 이파리 그늘이었다. 그 그늘에서의 키스는 느낌이 아주 이국적으로 강렬했다. 파초의 꿈이었을까. 파초 앞에서는 어떤 그리움이 더 자극한다.
--- p.346
그믐달은 가장 어둡고 깊은 밤하늘의 원한을 뚫고 곧 내비칠 어둑새벽 동살의 고독한 척후병이다. 그 시각에 눈떠 있던 서영은 혁진이 삭제하기 전 이미 문자를 읽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안개강,이라는 표현에 꽂혔고, 그리하여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울돌치숲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줬다. 안개강 너머 울돌치숲.
--- p.352
죽음 이후 간 그곳이 사랑이라면, 울돌치숲은 사랑 이후에 가는 곳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죽음 너머 사랑의 숲이 되었으면 해요. 푸른빛 사랑이 넘치는. 거기서 사랑의 숨은그림찾기 놀이를 하려고요··· 혁진 씨, 홧팅?
--- p.354
율희는 자작나무볶음밥을 먹으며 산 사람처럼 하얗게 웃는다.
---「마지막 문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