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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의 슬픔이 너무 많이 사냥당했다

시인수첩 시인선-075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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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9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168쪽 | 22g | 124*198*20mm
ISBN13 9791192651149
ISBN10 1192651146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그리하여 나는 나 대신 그대를 팔아 여기까지 왔고 그대는 유리 절벽 위에 놓여 있다 지나온 경계마다 은빛 눈이 내려 슬픔은 메우지 못했다 이제 벽 너머에선 어떤 음률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왜 허공에 발을 헛디디고 있었을까 햇살조차 깨어진 부도(浮屠)처럼 날카롭다

그대의 동공 속에 불안한 속도를 견뎌낸 경계인이 보인다 그 동공의 무늬는 미로다

여기까지 오면서 나는 그대에게 비겁하거나 용감했고 말이 많거나 적었고 무거우면서도 중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희망을 떠올리며 절망에서 허우적거렸다 얕게 분노하고 깊게 뒷걸음질 쳤다 얼굴을 외면한 어느 철학자처럼 이 모든 것은 계산된 연극이었던가 몸 위로 젖은 나뭇잎 겹겹이 쌓인다

그대에게 늦은 안녕을 고한다 미안하다 나의 철창이여 허물어지는 육신을 지탱한 중심이여 이제부터 나를 외면하라 그러면 본 적 없는 표정이 그대에게 스며들 것이다 잘 있거라 어찌하지 못할 눈동자여 해빙점을 분실한 심장이여

이름도 없이 절벽으로 밀린 그대는
허구로 뭉쳐진 몸을 견뎌낸 비겁한 나의 나였다
---「자화상 - 마음에게」중에서

나는 질주한다,
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원래 숨을 헐떡인다. 느리게 걷지 않는 것은 보이는 전부가 다 저장되어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다. 나는 무엇도 낳지 않았고

수억 년 전에서 왔다. 아버지가 나이고 내가 아들이다.

연인이었고 음악이었고 애증이었다. 유령이었고 고독한 손결이었고 결국엔 성난 눈이었다.

잎사귀가 죄다 추락한 나무, 쓰러진 채 깜박이는 가로등, 펄럭이다 흐느끼는 간판, 브레이커가 고장 난 사랑, 피의 혁명, 그 무엇도 나와는 무관하다. 나는 누구의 울음도 원하지 않았다. 단지 깨어져 버릴 관능을 동경했을 뿐

그대는 내가 해석되지 않고 나도 내가 해석되지 않고
단지 멈추지 않고 주행토록 왜곡되었을 뿐,
그 무엇과도 공범은 아니다.
물론 역주행은 있었겠지. 허공을 향해서도

수천 개의 뼈가 덜거덕거린다. 스산한 신음을 뿌리며

고백건대 어둠과 침묵의 덩어리인 내가 스스로 울음을 흘린 적은 없다. 진흙이 목구멍까지 밀치며 들어오곤 했다. 나무와 강물과 바다와 바위와 모래가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들이쳐

나인 듯 울었다.

국경과 국경을 지나면서 혹은 해변과 산정을 지나면서
몸 안의 슬픔이 너무 많이 사냥당했다.
---「바람의 書 - 사람들이 나를 느끼지 않고 이해하려 하므로 그들이 두렵다」중에서

너와 내가 오르내렸고 균형이 흔들리고 있었다 네 스물셋보다 나의 스물일곱이 가벼웠는가보다 그것은 마음의 중량, 저녁은 깊게 익어 갔고 덜 익은 감정만 네게로 기울고 있었다 멀미로 울렁이던 얼굴, 내 하체의 질량이 가난하다는 게 조금은 슬펐다 까닭에 함께 포개지진 못하여 가지런하고 정숙한 네 다리 건너편에서 흔들리기만 했다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나를 흘리던 지대 나는 너의 중심에서 멀어져 더욱더 가벼워졌고 시차를 앓았기에 어둠 스며들면 어느 별에라도 닿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추억이 많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직도 견디지 못할 만큼 심장은 불규칙적이다 추락은 어떤 예고도 없기에 캄캄한 허공의 체류는 막막하다 저편엔 너 대신 술에 취한 또 다른 네가 있고 스물셋의 너는 여전히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새의 동공 같은 빛깔로 밤은 짙어가는 데 불안이 어른거려 나는 점점 더 가벼워진다 그때 네가 나를 가늠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내가 나를 버리고 있었다 넌 몸이 어렸고 나는 영혼이 종잇장처럼 얇았다

옆에서 지구본이 둥근 윤회를 한다 무릎을 꿇고 싶을 만큼 고독한 밤, 나는 푸른 지대를 한참 지나 한없이 기울어져 가고 지금은 나를 대신하여 시소가 삐걱대며 울고 있다
---「저녁과 밤 사이의 Seesaw」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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