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창세기를 캐스팅하다》라는 제목으로 내놓게 되었습니다.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약간은 에세이 같은 책이죠. 독자들이 까다롭고 딱딱한 신학책을 에세이처럼 술술 읽어나간다면 이 책은 절반은 성공한 셈입니다.
--- p.4, 「머리말」 중에서
오경은 기독교인들의 세계관 형성과 신앙과 실천에 있어서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성경 안에서도 책 중의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p.4, 「머리말」 중에서
저는 이 책을 써가면서 전통 보수주의 신앙과 신학 위에 서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인가를 여러 번 실감했습니다. 이 책은 입문서이므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보면 좋겠습니다. 배울수록 기본이 중요하다는 말 있잖아요?
--- p.6, 「머리말」 중에서
창세기는 눈부신 과학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을 당황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도 이 책이 현대인들을 매료하는 이유는 여기에 나오는 사건들이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인간과 세계에 대해 심오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대서다. 그래서 창세기가 빠져 있는 역사란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 p.16, 「창세기를 들어가면서」 중에서
창조는 상상 속의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일어났다! 창조의 역사성 규명이 지난한 일이긴 해도 우리는 믿음으로 세계와 우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질서 있게 창조되었다고 확신한다. 창조는 그 역사성을 규명하기 어렵다고 해서 구약신학에서 소문난 의붓아들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창조는 성서를 종합적으로 진지하게 접근해야 그 진가가 드러난다.
--- p.20, 「창세기를 들어가면서」 중에서
창세기는 신학자들은 물론 철학자들 사이에도 수많은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예수님은 창세기에 관한 논란의 종결자다.
--- p.27, 「창세기의 명칭과 기능」 중에서
우리는 지금 슬프게도 성경의 권위가 크게 무너져 내린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 없이도 세상은 그런대로 굴러가고 있고, 절대 진리니 구원이니 하는 고상한 것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여기는 세태다. 그러나 신앙인은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것까지는 없다.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 두신 것처럼 영적으로 무지한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남겨 두셨기 때문이다.
--- p.27, 「창세기의 명칭과 기능」 중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거뜬하고 유연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려고 마음먹었을 때 무슨 갈등이나 고민이 있는 것 같은 분위기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단호하지만 평안하게, 엄중하지만 은혜롭게, 번거롭지만 지혜롭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 p.88, 「창세기의 내용」 중에서
그러므로 창세기의 궁극적인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창세기의 저자라는 사실은 창세기 선언들의 신적 진리, 역사적 사실, 사료의 편찬을 확실히 보증해준다. 만일 아담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면 우리들 기독교인들은 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지 종잡을 수 없게 된다. 아담의 역사성은 복음으로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 p.116, 「창세기의 내용」 중에서
신학자들의 이러한 견해는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역설해준다. 인간은 원숭이가 아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다. 그는 동물과 같이 열등하고 추잡하지 않다. 남자는 처음부터 남자고, 여자는 처음부터 여자로서 양성이 모두 평등하다.
--- p.150, 「창조」 중에서
창조 언약은 인간의 타락에도 대비한다.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경우를 예상해 창조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일종의 출구전략과도 같은 것이다.
--- p.170, 「창조」 중에서
그런 실망스럽고 무기력한 아담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성과 책임 있는 인간의 품격이 크게 망가진 것을 보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가 홀로 뱀에게서 유혹을 받으며 남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을 때 그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통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 p.174-175, 「창세기 3-11장: 타락에서 바벨탑까지」 중에서
아브라함은 신앙의 “모델인지 아니면 괴물(Model or Monster)인지 의구심이 들게 하고, 신앙은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낯선 이물감에 소름이 돋는 것이다. 그런 의구심이 뒤죽박죽 증폭이 되면 때론 하나님은 신앙인의 정서를 맘먹은 대로 조종해 궁지로 몰아놓는 ‘가스라이팅 가해자’(gaslighter)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솟구치는가 하면, 아브라함은 신실한 아버지인지 아니면 자식을 괴롭히는 아버지인지조차 헷갈리게 한다.
--- p.239, 「아브라함의 성숙」 중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군말 없이 순종할 수 있었을까? 이상하게 본문에는 언급이 없어서 그렇지, 아브라함이 견딜 수 없는 번민과 고통에 오열하면서, 달빛 아래 쪼그려 앉아 질문하고 또 질문하면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처연한 광경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 p.242, 「아브라함의 성숙」 중에서
목적이 분명해진 이상 야곱은 행동에 들어갔다. 그는 민첩하게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 라헬이 돌보았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일단 라헬의 환심을 산 다음, 경계심을 푼 그녀에게 다가가 살짝 입을 맞추었다. ‘까칠남’이 매력적인 ‘훈남’으로 돌변하는 순간이다.
--- p.252-253, 「영적인 성향보다 육적인 성향이 컸던 야곱」 중에서
야곱(이스라엘)이 얍복강가에서 강력하고 결정적인 불의의 일격(카운터블로우)을 당한 사건은 그의 삶을 180도로 바꿔놓게 하였다.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그의 신앙 여정은 하나님께서 가하신 최후의 일격에 마침내 완전히 쓰러져버렸던 것이다.
--- p.261, 「야곱 인생의 터닝 포인트 얍복강 사건」 중에서
38장은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와 그의 며느리인 다말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전통적으로, 주석가들은 구성진 요셉 이야기의 첫머리 부분에 끼어들어 온 이 반갑지 않은 에피소드를 못마땅해한다.
--- p.275,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낯 뜨거운 에피소드」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유다의 양심에 정밀한 타격을 가했다. 홀아비로 살면서 창녀의 유혹에 쉽게 몸을 맡겼던 그였다. 며느리의 항의로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났지만, 그 사실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고 몸을 낮춘 것은 그가 본질적으로 악당이 아니라 은혜의 빛에 노출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리라.
--- p.283,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낯 뜨거운 에피소드」 중에서
이것은 현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이지만, 많은 현대인은 신묘막측한 섭리(攝理)를 맹목적인 팔자(八字)로 이해하고 인생만사를 팔자소관이라고 이해한다.
--- p.293, 「하나님의 섭리―인간과 세계의 역사 배후에서」 중에서
요셉이 전격적으로 발탁되어 애굽의 제2인자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은 그 나라의 절대 군주인 바로(파라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로의 역할은 조연에 불과한 것 같지만 요셉 이야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 p.298, 「하나님의 섭리―인간과 세계의 역사 배후에서」 중에서
그러고 보면 요셉은 선택의 세 가지 요소, 즉 타이밍, 순서, 임팩트의 원리를 꿰뚫고 그것을 제대로 작동한 상황 인식과 타개의 달인이라고 하겠다. 요셉의 이러한 탁월한 면모는 그가 지혜자의 전형이라는 말 말고는 설명하기가 마땅치 않다.
--- p.300, 「이상적인 인간의 전형 요셉」 중에서
자, 그러면 족장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어 그 일을 해내실 것인가?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실천해 나갈 것인가?
--- p.308, 「이상적인 인간의 전형 요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