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세월이 흐른 후, 아이가 없던 메데야는 수많은 조카와 그들의 자식들을 크림에 있는 자기 집에 불러모아 조용히 비과학적으로 관찰하곤 했다. 그녀는 그들 모두를 아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 p.15
스키타이의 땅, 그리스인의 땅, 타타르인의 땅이었다. 비록 이제는 국영농장의 땅이 되었고 인간적인 사랑 없이 비통에 잠긴 지 오래지만, 재능 없는 주인들 때문에 서서히 황폐해졌지만, 그럼에도 역사는 그 땅을 떠나지 않고 봄의 축복 속에 간직되어 있었다. 돌 하나하나, 나무 하나하나가 이 땅의 역사를 떠올려주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광경이 메데야의 집 변소에서 펼쳐진다는 것은 조카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합의가 이루어진 사실이었다.
--- p.26
그들 열셋이 남았다. 이제 막 아버지를 잃은, 아버지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시간도 채 갖지 못한 열세 명의 아이.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연주하고 조총이 발사되는 가운데 치러진 몰살당한 선원들의 그 상징적인 장례식이 나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흡사 퍼레이드 같은 군대 오락으로 보였다. 1916년에 죽음은, 죽은 사람들을 거의 벌거벗은 채로 무덤도 없이 도랑에 묻었던 1918년 같은 야단법석을 아직은 떨지 않았다. 전쟁이 벌어진 지 오래였지만 멀리 있었다. 이곳 크림에서 죽음은 아직 낱개로 팔리는 물건이었다.
--- p.42~43
그해 메데야는 열여섯 살이었다. 언니, 오빠가 다섯, 동생이 일곱이었다. 그날, 필리프와 니키포르, 둘은 없었다. 둘 다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후에 둘 다, 한 명은 적군赤軍에게, 다른 한 명은 백군白軍에게 죽었다. 평생 메데야는 그들의 이름을 추도문의 같은 줄에 적었다……
--- p.44
겨울이면 그토록 고독하고 조용한 메데야의 지금 거처는 한창 휴가철엔 아이들이 넘쳐나고 대체로 사람들이 많아서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리게 했다. 철제 삼각대 위에 올려놓은 거대한 통 안에서 쉴새없이 빨래가 끓어올랐고, 부엌에서는 늘 누군가 커피나 포도주를 마셨다. (…) 여름날의 그 야단법석에 익숙해지긴 했어도, 사교적이지 못하고 아이가 없는 메데야는 왜 태양이 지글지글 굽고 바닷바람이 때려대는 그녀의 집이 이 온갖 다양한 종족의 많은 사람을 리투아니아와 그루지야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 끌어오는지 어리둥절했다.
--- p.66~67
조용하고 촉촉한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게오르기와 마샤는 마음이 누그러져서 친근하게 서로에게 기댔다. 모든 언쟁이 저절로 멎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고르지 못한 작은 창으로 목소리가 빛처럼 흘러나갔다. 반은 도둑들의 노래인 어렵지 않은 노래가 메데야의 농장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 p.70
대다수 지역 주민들도 그랬듯이, 메데야는 바다에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전후에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 심지어 시베리아에서 이주해 온 지금의 새 주민들과 메데야는 달랐다. 그들은 수영할 줄도 몰랐던 반면, 바닷가에서 태어난 메데야는 농촌의 주민이 자기 숲을 알듯이 이곳의 바다를 알았다. 물의 모든 습성, 물의 가변성과 불변성,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을부터 봄까지 변하는 물 빛깔, 온갖 바람과 물때를 알았다. 만약 메데야가 바다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면, 그녀는 혼자 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번에는 게오르기가 다 같이 가도록 그녀를 설득했다.
--- p.95
“백 년쯤 후엔 완전히 무너져내리겠네요.” 게오르기가 말했다. 메데야가 퍽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탸와 아르툠은 이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노인들과 아이들에게 백 년은 진지하게 말하기에는 서로 다른 이유로 인해 너무 긴 시간이다.
--- p.102
매력적이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녀가 딸을 대하는 방식과는 왠지 다르게 아이들을 대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애들한테 너무 엄격해.’ 아침에 노라는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애들한테 너무 관대해.’ 그녀가 낮에 내린 결론이었다. ‘저 사람들은 끔찍이도 애들을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있어.’ 저녁에는 또 그렇게 보였다. 감탄도 하고 부러워도 하고 비난도 했다. 그들이 삶의 전부가 아닌 일부만 아이들에게 쏟고 있다는 것이 관건임을 그녀는 아직 짐작하지 못했다.
--- p.107
하지만 메데야에게는 삼십 년 전에 잃어버린 이 반지의 발견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건들 사이에는 일반적인 인과관계 이외에 때로는 명백하게, 때로는 비밀스럽게, 또 때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게 사건들을 관련짓는 다른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마 그녀가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p.115
이제 그가 깨닫고 있던 것처럼, 실로 그의 아내 메데야야말로 나름의 어떤 법규에 따라 사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이들을 기르고 일하고 기도하고 단식하며 보여주었던 저 조용한 고집은 그녀의 이상한 성격적 특성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떠안은 의무, 어느 곳 할 것 없이 모두가 오래전에 폐기한 율법의 실천이었다.
--- p.246
그때까지 메데야는 산드로치카와 그녀의 첫아이 세르게이와 함께한 유일한 모스크바행을 빼면 평생 한곳에서 떠나지 않고 살았다. 혁명들, 정권 교체, 적군, 백군, 독일인들, 루마니아인들. 사람들이 내쫓기고, 다른 외지 사람들이 일가붙이 없는 땅에 이주당해 살았다. 그렇게 저절로 급속하고 격렬하게 변하던 삶을 떠나지 않았던 메데야는 종국에 돌바닥에 뿌리를 박은 나무 같은 단단함을 얻었다.
--- p.253~254
메데야의 기차는 십이 분 후에 다가왔는데, 사실 다섯 시간 늦은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로스토프를 떠나고 나서야 왜 카밀레꽃 헝겊이 그토록 낯익었던지 깨달았다. 그때로부터 삼십 년 전, 화재 후 다른 많은 필수품과 함께 니나에게 선물했던 그녀 자신의 커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얘기했던 옛 크림에 사는 이모는 그녀의 옛 이웃 니나였고, 두 젊은 남자는 그날 밤 메데야가 화상을 치료했던 소녀의 자식들이었다…… 메데야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람이 더 많아져서 세상이 더 북적거리게 되었어도, 세상의 구조는 여전히 바로 그녀가 이해하는 바 그대로였다. 작은 기적들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모든 것이 함께 예쁜 무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 p.262~263
“훔쳐선 안 되고, 죽여선 안 돼. 악을 선으로 만들 상황이란 없는 거야. 망상이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가는 것은 우리와는 전혀 무관해.”
--- p.282
또 메데야는 알도나가 영원한 모성의 노예 상태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저녁 늦게 그녀와 함께 앉아 그녀가 마련해둔 마가목 열매 보드카나 사과 보드카를 마시고 탄식도 했으면 싶었다. “아이고, 피곤해 죽겠네……” 푸념도 하고, 울기도 했으면 싶었다. 그러면 그때 메데야는 말없이 두꺼운 잔에 몇 번 입술을 대고 나서, 고생과 불행은 ‘무슨 죄를 지어서?’라는 질문이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으로 바뀌도록 주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그녀에게 이해시켜주고 싶었다.
--- p.302
어느 때보다 전환의 소용돌이가 강하게 일던 때인 1967년이었다. 빵은 무가치하고, 대신 입으로 전해지고 활자로 찍힌 말이 일찍이 없던 무게를 얻었다. 사미즈다트가 이미 은밀히 땅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시냡스키와 다니엘이 이미 형을 선고받았고, ‘물리학자들’이 ‘시인들’에게서 격리되었다. 봉쇄구역이 아닌 곳은 동물원뿐이었다.
--- p.317
“발레라, 그거 알아? 우리 가족은 좋은 전통을 하나 갖고 있어. 권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거지. 내 가까운 친척 중에 유대인 치과의사가 있었어. 그분이 기막힌 농담을 하나 했어. ‘내 영혼은 소비에트 권력을 그토록 사랑하는데, 내 몸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 그 일을 맡으면 넌 소비에트 권력의 몸통을 계속 건드리게 될 거야……” 니카는 마지막 말 전에 가볍게, 아주 예술적으로 욕을 퍼부었다.
--- p.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