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Nine Tailed Tall Tales:Trickster, Mongrel, Beast)〉는 민속 신화 및 대중문화에서 의인화된 동물 캐릭터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영문 제목에 쓰인 사기꾼(Trickster), 잡종(Mongrel), 짐승(Beast)이라는 단어는 우리 사회 주변부에 존재하는 것을 천대할 때 사용하는 어휘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특별하지만 부정적인 존재들에 대한 전반적인 은유를 담아내어 ‘구미호’를 전면에 내세운다. 구미호는 주로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장하여 사람을 꾀어내는 ‘사기꾼’의 모습이 강조된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 속 구미호는 수호자 혹은 지혜가 있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재해석된다. 또한 현실에서는 사람에게 귀찮은 존재로 조롱받는 갈매기, 까마귀, 여우와 같은 동물들 역시 신화적 상상력을 더해 권능한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이렇듯 제이디 차는 ‘이야기’ 형식을 빌려 익숙한 이미지를 뒤집고 뒤섞음으로써 우회적으로 인간의 정의, 지식, 믿음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전시장은 각각 특색을 지닌 3개의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첫 번째 공간에서는 해태를 타고 있는 마고할미가 관객을 맞이한다. 양옆으로 보자기에서 영감을 받은 기하학적 모양의 천이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창문처럼 설치되었다. 두 번째 공간은 다채로운 색으로 꾸며진 미로로, 위쪽으로는 작은 꼭두 조각들이 곳곳에 배치된다. 미로 내부에는 초상화 형식의 회화가 설치되었다. 미로 공간이 협소하기에 근접해서 회화를 감상하게 된다. 세 번째 섹션은 사당과 같이 지어진 구조물과 제단화로 의도된 대형 회화가 펼쳐진다. 그 앞으로 한국의 샤머니즘을 참조하는 의복 작업이 허공에 매달려있고 조각보의 색면이 연상되는 부드러운 카펫으로 전통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전체적으로 어두우면서 무속적이고 경쾌한 인상이 강하다.

작가는 신작 회화에서 여러 동물을 조합한다. 특히, 다양한 반인반수 캐릭터를 등장시키는데 〈집, 2023〉에서는 갈매기의 머리에 인간의 귀와 몸을 합쳤다. 작가는 갈매기와 같이 도시에 살며 사람을 귀찮게 하는 존재들에 주목한다. 작가는 이들이 역으로 인간에 의해 삶의 영역을 침범당했으며 지금의 상태는 인간 주변에서 살아가기 위해 적응한 결과로 해석한다. 때문에 작품 속 동물에 반인반수의 표현을 자주 등장시켜 서로 다른 종에 대한 존중과 연대의 의미를 강조한다.

〈트릭스터, 잡종, 짐승, 2023〉에서는 동물의 지위를 존중과 숭배의 대상으로 그렸다. 이 작품은 3폭의 대형 회화로 구성되어 제단 형태의 구조물에 설치된다. 작품 중앙에 그려진 동물은 갈매기와 여우의 혼종으로 등장한다. 마치 신화적 존재로 묘사한 이 동물은 사자와 독수리의 혼종인 전설의 새 그리핀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처럼 작가는 혼종의 캐릭터로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존재를 승격시키고자 한다.

한편, 작가는 초상화 형식으로 지혜롭고 강인한 존재로서 할머니를 그린다. 〈미래의 우리들, 2023〉에서 할머니는 흐릿한 배경 앞에 인물의 상반신만 나온 전형적인 초상화 형식이다. 미술사에서 초상화는 젊고 이상적인 외모와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기능했다. 반면 작가의 초상화 속 인물은 깊은 주름이 사실적으로 묘사되며 뚜렷한 눈매와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당당히 그려진다. 또한 〈미래 할미, 2023〉는 포근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동물들과 자연에 둘러싸인 노파의 모습에서 작가는 ‘이상적인 나의 미래 모습’이라 말한다.

작가는 그간 대중문화와 전통 설화에서 나이 든 여성들이 묘사되는 방식에 관심이 많았다. 여러 문화에서 여성들은 가임기가 지나면 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그려졌으며 마녀나 노파같이 부정적 존재로 묘사되었다. 반면에 한국 설화에서 할머니는 지혜와 통찰을 겸비한 신으로 우주 만물을 지어낸 창조신(마고할미)이자 인간의 탄생(삼신할미)에도 관여하는 존재다. 전통 설화는 작가에게 나이든 여성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주었으며 이에 작가의 ‘할미’들은 권력과 지혜의 주체가 된다.

제이디 차는 자전적 서사와 모티브를 작업 세계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의 반려견은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며 그림 속 여성의 모습엔 작가 자신의 초상을 담는다. 특히, 곳곳에 등장하는 소라는 작가가 제주도에서 발견한 것으로 어머니의 고향인 한국과 자신의 고향인 밴쿠버를 잇는 매개체다.

이번 전시는 이민 2세대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우리 전통 설화의 캐릭터에 집중해 소외된 존재들을 탐구한다. 작가는 도시의 천덕꾸러기 신세인 동물들을 인간이 되고자 하는 구미호에 비유하며 사회구성원으로 동화시키고자 한다. 이처럼 대상의 시각 전환을 의도하는 작가는 전통을 오래된 무엇으로 치부하기보다 지금 시대를 통찰하는 새로운 도구로 활용한다. 이번 전시는 제이디 차의 다양한 회화, 설치 작품으로 우리 전통이 지금 시대에도 유효함을 다시금 환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