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시골의 일개 천한 출신이지만, 나라가 기이한 치욕을 당하매 청천백일靑天白日 아래 나의 그림자가 부끄러워 한사람의 신민臣民된 의리로 원수 같은 왜놈 한 명이라도 죽였거니와, 내가 아직 우리 사람 중에 왜놈 천황을 죽여 복수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이 몽백蒙白을 하였는데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임금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백을 아니 한다.’는 구절도 읽어 보지 못하고 한갓 부귀영화와 총애와 녹봉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
이재정과 김윤정을 비롯하여 참석한 관리 수십 명이 내 말을 듣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니 저마다 얼굴에 홍당무 빛을 띠었다. 이재정이 마치 내게 하소연하는 말로, “창수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감함을 흠모하게 되는 반면에 나의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비할 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신문하여 위에 보고하려는 것뿐이니 사실이나 상세히 공술하여 주시오.” 하였다. 김윤정은 나의 병세가 아직 위험함을 보고, 감리와 무슨 말을 소곤소곤하고서는 압뢰에게 명하여 도로 하옥시켰다. 나를 신문한다는 소문을 들은 어머님은 경무청 문밖에서 내가 압뢰의 등에 업혀 들어가는 것을 보시고는, ‘병이 저 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말을 잘못 대답하여 당장에나 죽지 아니할까.’ 하는 근심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신문 시작부터 관리들 전부가 떠들기 시작했고, 감리서 부근 인사들은 벌써부터 희귀한 사건이라며 구경하는 자가 많았는데, 뜰 안은 발 디딜 곳이 없어서 문밖까지 빙둘러 서서,
“참말 별난 사람이다. 아직 아이인데 사건이 무엇이냐?”고 하였다. 압뢰와 순검들이 보고 들은 대로, “해주의 김창수라는 소년인데 민 중전 마마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놈을 타살하였다나. 그리고 아까 감리 사또를 책망하는데 사또도 아무 대답을 잘못하던 걸.” 한다. 이런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졌다.
---「「상권」, ‘치하포사건 : 1차 투옥’」중에서
“내가 지난해에 동경에서 천황이 능행陵幸한다고 행인들에게 엎드리라고 하기에 엎드려서 생각하기를 ‘내게 지금 폭탄이 있다면 쉽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젊은이들이 술 마시는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이 씨의 말을 유심히 듣고 저녁 시간에 이 씨의 여관을 조용히 방문하였다. 이 씨와 속마음을 털어 놓고 마음속에 있는 바를 다 말하였다. 이 씨는 과연 의기남자義氣男子로, 일본에서 상해로 건너올 때 살신성인할 큰 결심을 가슴에 품고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씨는 이런 말을 한다.
“제 나이 31세입니다. 이 앞으로 다시 31세를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반생半生의 생활에서 방랑 생활을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 하면, 31년 동안 육신으로는 인생 쾌락을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 쾌락을 꾀하기 위하여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로 왔습니다.”
나는 이 씨의 위대한 인생관을 보고 감격의 눈물이 눈에 가득 참을 금치 못하였다. 이봉창 선생은 공경하는 의지로 나랏일에 헌신할 수 있도록 지도를 청한다. 나는 기꺼이 승낙하였다.
“1년 이내에 그대의 행동에 대한 준비를 할 텐데, 지금 우리 정부는 경비가 군색하여 그대가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주기가 불가능하고, 장래 행동을 위해서는 그대가 우리 기관 가까이에 있는 것이 불편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니 이 씨는 말하기를, “그러시다면 더욱 좋습니다. 이 아우는 어릴 적부터 일본말에 익숙하였고, 일본서 지낼 때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성명을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고 행세하였습니다. 이번에 상해 오는 도중에도 이봉창이라는 본성명을 쓰지 않았으니 이 아우는 일본인으로 행세하겠으며, 준비하실 동안 이 아우는 철공 일을 할 줄 아니까 일본인의 철공장에 취직하면 많은 봉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다. 나는 대찬성하고, “우리 기관이나 우리 사람들과의 왕래와 교제를 빈번히 하지 말고, 순전히 일본인으로 행세하고 매월 한차례씩 밤중에 와서 보시오.”라고 주의시키자, 그는 홍구로 출발하였다.
---「「하권」, ‘이봉창·윤봉길 의거」중에서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희비가 뒤얽힌 마음으로 상공에 높이 떠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상해에서 출발한 지 3시간 후 김포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착륙 즉시 눈앞에 보이는 두 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도 하나요 슬픔도 하나였다. 책보를 메고 길에 이어 돌아가는 학생의 모습을 보니, 내가 해외에 있을 때 ‘우리 동포들의 후손들은 왜적의 악정惡政에 주름살을 펴지 못하겠구나.’라고 우려하던 바를 뛰어넘어 활발 명랑한 기상을 보여 주니 우리 민족의 장래가 유망해 보였다. 이것이 기쁨의 하나였다. 그 반면에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이 사는 가옥은 빈틈없이 연이어 겹쳐 있으나 집이 땅에 납작 붙어 있으니, 이것을 볼 때 동포들의 생활수준이 저만큼 저열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이 유감의 하나였다. 얼핏 들으니 수많은 동포들이 나를 환영하려고 여러 날 동안 모여들어 몹시 기다렸다고 하나 그날은 나와서 맞이하는 동포가 많지 않았는데, 그것은 미군을 통하기 때문에 통신이 철저하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노구를 자동차에 의지하고 차창으로 좌우를 바라보며 한성에 도착하니 의구한 산천도 나를 반겨주는 듯하였다.
---「「계속」,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