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닥에 너 같은 애가 한둘인 줄 알아? 플루토가 나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상황이 나빴다고는 생각을 안 해봤어? 내가 소리치자 플루토는 미동 없는 눈으로 내게 물었다. 제가 언니를 믿고 창고에서 산 것처럼요? 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럼 내 딸이 사는 집에 널 데려왔어야 했니.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플루토의 눈동자 안에 내가 담겨 있었다. 플루토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김소이,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중에서
홀수가 되면 누군가는 깍두기가 되거나 빠져야 하는 놀이에서 주원은 늘 제명당했다. 그어진 금 바깥에서, 그 안을 바라보면서 주원은 빨리 누군가가 죽길 바랐다. 그래야 차례가 돌아오니까. 그래야 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어머, 어떡해. 그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졌다.
---「박민경, 스위트 홈」중에서
만 원 한 장에도 벌벌 떠는 사람이었다. 여의도에서 구로동까지 버스비가 없어 동이 틀 때까지 걸어가던 사람. 그런 주머니 사정에도 기어코 여의도까지 쫓아와서 함께 술을 마셔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정선이였다. 나는 정선의 그런 모습에 동질감을 느꼈고 가까워지게 되었지만, 동시에 언젠가 그런 정선이의 모습을 제일 저주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정선이에게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보았고 동질감을 느꼈고 그건 애초에 잘못된 관계의 시작에 불과했다.
---「예소연, 내가 머물던 자리」중에서
인류는 죽기로 합의했다. 이 문장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는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문장을 찾지 못했다. 정확성이 결여된 문장으로 고쳐 말하자면 인류는 사라질 것을 결심했다. 지구상에서. 이는 인류가 우주로 향한다는 말장난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우주 시대에 대한 공상이 발효되어 부풀던 시절이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신앙이 인간의 사유를 넘어서는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미래가 와도 인간은 결국 지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서 살아가는 것? 그런 꿈은 과학자가 아닌 신학자의 영역이 되었다.
---「공현진, 모두가 사라진 이후에」중에서
박카스 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그게 공원이었는지 동네 뒷산이었는지 기억이 점차로 혼란해졌다. 다만 그때 무언가 본 것만은 확실했다. 커다란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너구리. 기억 속 너구리는 노랬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너구리는 잿빛이라고 했는데. 연지가 본 노란 너구리는 두 발로 걷고 있었고, 연지에게 말을 걸었다. 가지 말자. 어디를? 집에. 왜? 같이 찾자. 뭐를? 집.
---「서고운, 너구리 온다」중에서
나와 이선은 이 일을 지나치게 사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일의 운명은 언제나 타인의 손에 달려 있었다. 생애 주기에 따른 발달과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치르는 대가인 걸까. 그 대가가 이토록 지독한데도, 나와 이선은 대체 왜 이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걸까.
---「전지영, 뼈와 살」중에서
창밖에 사람들은 전부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프록코트. 청바지. 귀덮개가 달린 털모자. 뺨에 부스럼이 난 아이들. 개의 도약대. 겨울옷을 입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미지근한 물에 풀어놓은 소금 입자들처럼 그들은 어느 정도 흐리게,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정말 그런가?” 거리가 멀어 다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12월의 일요일 아침이었다. 정부영은 얼굴에 비스듬히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얇아서 눈을 감아도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햇빛을 견디지 못해 탈색된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주 오래전에.”
---「김채원, 영원 없이」중에서
비둘기1과 비둘기2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무대 조명이 분홍빛으로 바뀌었다. 덩달아 계단도 은은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무대 조명에 따라 계단은 계속해서 색을 바꾸었다. 분홍색에서 노랑색으로, 노랑색에서 파랑색으로 바뀌는 계단을 보면서 나는 평생 저 계단만 보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보고 있으면 누군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올 것 같았다. 내가 늦었지, 하고 계단을 폴짝 뛰어내려 나에게로 걸어올 것 같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일 없이 연극은 끝이 났다.
---「성수나, 투명 비둘기」중에서
숙희의 손을 잡았다. 숙희는 얌전히 나를 따라 집으로 왔다. 숙희는 현관에 앉더니 운동화도 못 벗고 바닥에 누워버렸다. 숙희에게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술도 술이지만 며칠 씻지도 못한 것 같았다. 숙희의 운동화를 벗겼다. 얼마나 오래 신었는지 깔창까지 패여 너덜너덜했다. 숙희를 일으켜 언니 방으로 옮겼다. 언니가 따뜻한 꿀차를 줘서 내가 먹였다. 숙희가 갑자기 낄낄 웃었다. 상미야, 나 임신했어.
---「김노랑, 해 드는 방」중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눈앞에 영화가 펼쳐진다. 익숙한 얼굴, 대수가 보인다. 그는 거친 숨을 들이켜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육촌형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광주에서 화순 사평으로 가는 길이다. 대수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고개를 넘어야 한다. 잰걸음으로 너릿재 초입에 들어서는데, 등 뒤에서 낯선 사내의 음성이 들린다.
---「타라재이, 소년에서 먼 빛까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