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로 병원까지 다녀온 시우는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였다. 그날은 어버이날을 앞두고 감사 편지 쓰기를 했다. 평소 손에 무엇을 쥐여 주면 집어던지는 시우였는데, 그날은 사인펜을 꼭 잡고 있었다. 그래서 지환은 지우의 손을 잡고 색종이로 만든 카네이션꽃 리본에 ‘엄마, 감사합니다. 사랑해요.’라고 썼다. 시우는 죽음을 앞두고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환이 쥐어 준 사인펜을 꼭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감사 편지를 쓰는 시우의 감정은 어땠을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시우의 마음을 좀 더 많이 담을걸….’
분위기가 묘했다. 영진이가 졸업한 이후로 전혀 소식이 없었던 사람이다. 문상을 와 준 것도 이상한데, 도울 일이 있을까 싶어 삼촌이라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했다. 시우 어머니는 뭔가 모를 경계심의 촉을 세웠다. 혼자 시우를 키우면서 낯선 사람의 친절에 속아 어려움을 겪어 봤던 터라 사소한 친절도 부담스러웠다. 지나친 경계심이 사람 관계를 어렵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학습된 것은 고쳐지지 않았다.
“음식이 기도로 넘어가서 그랬다면서?”
“네, 저녁을 먹다가 경기를 했어요. 경기를 자주 하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입안에 있는 음식물을 제거하고 좀 눕혀 놓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더라고요. 다 빼내지 못한 것이 기도를 막고 있었나 봐요. 15년을 키웠으면서 엄마가 그것도 몰랐다니 한심하죠?”
“저녁을 먹다 그랬는지 그 전에 그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시우는 씹는 것도 그렇고 삼키는 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어요. 경기하지 않았을 때, 음식이 기도로 넘어가는 일은 없었거든요.”
“그야 모르지. 학교에서 여러 아이를 먹이다 보면 엄마처럼 신경 쓸 수 있었겠어?”
“그러세요. 저는 충분히 기회를 주었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십시오. 이 문제를 언론에 알리면, 언론은 절대로 선생님 편이 되어 주지 않을 거예요. 최근에 특수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 봤지요? 우리는 언론에 선생님이 시우를 죽게 만든 살인자로 만들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이 학교와 선생님은 만신창이가 된다는 것 잊지 마세요.” 박정태는 언론 보도라는 협박 카드를 내밀었다. 지환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사실 가장 두려웠던 것이 언론이었다. 언론은 절대로 지환의 편이 되어 주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라는 자체가 정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사건의 진실은 절대로 여론이 만든 정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가방을 정리해서 손잡이에 걸려고 하는데, 휠체어 등받이에 있는 작은 주머니에 뭔가 들어 있었다. 휴대폰이었다. 지환은 가슴이 마구 요동쳤다. 가방을 뒤졌을 때 녹음 장치가 발견되지 않아 마음이 놓였는데, 막상 찾던 휴대폰을 발견하니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교사로서의 모멸감이 온몸을 서늘하게 했다. 녹음 모드로 설정되어 있는지, 휴대폰을 열어 확인할 수가 없었다. 손으로 건드리면 터져 버릴지도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다. 법적으로 처리하겠다고 경고를 할 수도 있는데, 이미 시우 문제로 소송에 걸려 있다. 이런 상황에 법적인 대처를 하겠다고 하면, 동료들이나 학부모들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다.
“너무 뻔하고 많이 받아 봤을 질문이겠지만, 어떻게 특수교사가 되셨어요?”
오랜만에 받아 보는 질문이다. 교직 초창기에는 많이 받았던 질문이고, 제법 열정을 갖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열정과 자신감은 어디 가고, 왜 특수교육을 하고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고 지냈다.
“특수교사라고 하면, 흔히들 대단하다고 해요. 마치 무슨 수도자를 보는 듯한 태도를 보이죠. 저도 처음 시작은 그렇게 했어요. 이 일이 저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고, 이 일을 하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선택했노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정과 자신감이 얼마나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지 않는 시점부터 특수교사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했어야 했는데…….”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평생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그런 것을 천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맞아요. 사실 저는 그럴 수 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특수교사가 되려고 했던 이유조차 잊은 채 살아가고 있죠.”
이 사람은 뭘까? 지환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 상황에 이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마치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느껴졌다. 지환은 어쩌면 이것이 지리산을 오게 된 이유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