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이 보라색을 본 적이 없는데, 다만 특별히 수행을 한 소수의 사람만 보라색을 볼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보라색을 본 사람은 이치의 측면에서 “보라색은 파란색과 빨간색의 사이에 있다.”라고 하거나 “보라색은 빨간색과 파란색이 혼합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보라색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에둘러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보라색의 신비로움을 진짜로 들여다볼 수 없다. 만약 수행한 사람이 “보라색은 매우 신비롭게 느껴진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이론을 도출해서 차분한 파란색과 열정적인 빨간색이 어떻게 신비로운 보라색을 만들어내는지 토론할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은 차분함과 열정은 충돌하는 감정이며, 충돌하는 감정이 한데 섞일 때 신비감을 조성하기 쉽다고 주장하는 매우 일리 있는 논문을 쓸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차갑다가도 열정적으로 보이면, 그 사람이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학술연구는 매우 일리가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다. 보라색을 볼 수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서양 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의식은 반드시 피의식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이 성질을 특별히 ‘의향성’이라고 명명하는데, 의식은 항상 어떤 방향이 있고 어떤 내용을 향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내용이 없으면 의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관점은 수행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관찰에 해당한다. 수행을 거치고 나면 보통을 초월하는 경험을 할 수 있으며, 그 불꽃이 꺼진 순수의식이야말로 수행하여 무아를 몸소 증득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보라색을 보고 나야 진짜로 보라색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체험을 해야 정말로 무아를 깨닫는다. 에둘러 말하는 것으로는 결코 참다운 도를 깨달을 수 없다
---「무아(無我)란 무엇인가?」중에서
불교를 배우는 것은 사실 새로운 관점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관점을 배우는 것과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은 다르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은 이전에 알고 있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지만 새로운 관점을 배울 때는 반드시 기존의 관점을 아예 제거해야 한다. 이런 학습 과정은 일종의 지식 전체에 대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다에서 낡은 배를 완전히 뜯어내고 새 배를 만드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기존의 낡은 관점을 아예 제거해야 하는 이러한 일 자체가 가장 어려운 단계이다. 이 어려움 또한 집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철학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가 정말로 옛것을 제거하고 새것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고, 본래의 지식 기반이 이미 제거되어 아무런 지식 기반이 없는데 어떻게 새로운 지식이 기존의 낡은 지식보다 더 진상(眞相)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이점에 대하여 불교는 대체로 진짜로 새로운 관점을 파악한다면, 저절로 이것을 진실로 생각하게 될 수 있다고 본다. 진상을 발견하는 이러한 인식 과정을 ‘지혜의 직관(直觀)을 통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마치 탐정이 안개처럼 뒤섞인 실마리 속에서 갑자기 하나로 꿰뚫는 일관된 생각을 보았을 때, 영감이 번쩍이고 안개가 걷히며 세상의 모든 것을 간파하여 하하 하고 크게 웃으며 한없이 기뻐하는 것과 같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단계에 이르러서야 불교를 읽고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상태를 ‘도를 깨우쳤다[悟道]’라고 한다. 하지만 도를 깨우쳤다는 것은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고 그 단계 역시 다양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하는 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사람들이 정말로 이러한 새로운 관점으로 바꿔서 세계를 볼 수 있다면 본래 기존의 낡은 관점과 고통을 가져오는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해탈이고 깨달음이다. 그런데 단지 이러한 관점을 배운 것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은 사실 쓸모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현재 지니고 있는 지식의 기반 위에 새로운 관점을 더하는 것일 뿐이며, 이때의 새로운 관점은 기존의 낡은 관점에 의해 왜곡된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진정으로 체득해 깨달아야 한다. 체득해 깨달으면 진정으로 새로운 관점을 깨달아 기존의 관점을 완전히 내려놓게 된다.
---「어리석음을 보고 어리석음을 없애라」중에서
전설에 따르면 염라대왕은 한 사람이 평생 했던 모든 일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인 업경대(業鏡臺)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물건이 정말로 존재할까? 사람마다 개인이 살아온 일생의 전 과정을 녹화하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없다면 이러한 생각은 매우 비과학적인 것일까?
사실 정말 비과학적이라 해도 이것이 틀린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과 진리의 거리는 한없이 멀고, 얼마나 많은 증거를 찾았든 간에 모두 하나의 진리를 확인할 수 없다고 보는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 같은 대철학자도 있다. 그리고 업경대 같은 물건이 존재한다고 해도 반드시 과학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시간이 불가역(不可逆)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허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인식은 시간의 단일 방향에 제한을 받지만 실제 물리적 세계에는 이러한 제한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어느 시점에 발생한 어떤 일은 우주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이 관점은 단지 우리의 제한된 인지능력으로 인해 생기는 착각일 뿐이다. 만약 이 생각이 맞는 것이라면 누군가 우리의 일생을 녹화할 필요가 없다. 인지능력이 시간의 일방성에 제한받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면, 과거를 돌아보기만 하면 곧 이미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들추어낼 수 있다.
---「업력의 수행」 중에서
나의 개인적인 철학 사고와 수행 체험을 가지고 말하면, 이 문제는 이론적으로 간단한 해답이 없다. 이타(利他)의 이면에 있는 진짜 이유가 이기(利己)라면 그것은 진정한 이타가 아니다. 진정한 이타가 아니면 자비심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이기적인 요소가 없이 오로지 이타를 말하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동기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를 곤경에 빠지게 하는 이 전체적인 사유는 ‘남과 나를 구분하는’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며, 나를 위하는 것은 너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너를 위하는 것은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며, 두 가지는 완전히 구분된 개체이다.’라는 구조이다. 이 구조 자체가 수렁에 빠지게 하는 관건이며, 우리에게 합리적인 해답을 찾기 어렵게 만든다. 가령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동력이 이기에 있다면, 이타적인 행위의 동력도 당연히 이기에 있지만, 이기를 출발점으로 하는 이타는 진정한 이타가 아니다. 이러한 사유 구조에서는 단순한 이타적인 행위는 불가능하게 된다.
마음에 남과 나를 구분하는 이러한 사유 구조를 가지고 있는 한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먼저 이기와 이타의 절대적인 구분을 없애야 한다. 그것을 없앨 수 있어야 이 사유의 늪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날 길을 찾고 어리석음[無明]에서 깨어나 이 모순을 없앨 수 있다.
---「자비심 수행」중에서
마음을 가라앉힌 상태에서는 특별한 신비로운 경험이 생기기 쉽다. 사람에 따라 다른 느낌과 심지어 어떤 환각까지 생긴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감각들은 대뇌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마음을 가라앉히기 시작할 때, 대뇌는 분명히 평소와 다른 상태에 놓이게 된다. 여러 곳에 있는 나머지 신경전도가 계속 돌아다니는 가운데, 이러한 신경전도들이 평소와 다른 감각 현상을 저절로 만들어낼 것이다.
경험이 풍부한 많은 수행자들의 조언에 따르면, 이러한 특수한 느낌에 신경 쓰지 않으면 그것들은 보통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게 되고, 신경 쓰지 않아야만 금방 가라앉게 된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런 느낌이나 환각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려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로운 경험이 아무리 재미있고 즐겁더라도 우리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방해자일 뿐이다. 만약 이러한 신비로운 경험이 즐겁지 않았다면, 더 돌아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연히 신경 쓰지 말고 그것들을 무시한 채 계속 집중해서 의식을 우리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으로 돌아오도록 이끌어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가장 고요한 세계와 내용이 없는 순순한 의식을 목격하고 무아를 직관(直觀)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좌선 수행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기도 하다.
---「좌선 수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