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강요하고 정말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일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 사회를 바라보고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하지 못하는 이 역할을 특정한 집단에게 위임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 사회를 대신해서 바라보고, 분석하고, 또 비판하고, 또 우리가 지금 있는 세계로부터 다른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 줄 수 있는 다른 비전들을 고안해 내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술가들입니다. 진짜 예술가들입니다.”
--- p.16, 「프리 레이선, 「사회 안에서 예술의 역할」」중에서
“‘다원예술’의 위태로운 태생과 불안정한 정의를 빌미로 그것이 지시하던 새로운 방법론들을 무화하는 것이야말로 학술적인 태만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었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촉매제가 되어 어떤 새로운 가능성들을 견인했는가의 문제이다. […] 다원예술은 때로는 불가능한 가능성들이다. 다원예술은 불가능을 지시하고 수행하는 실천이다. 불가능한 범주의 불가능한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 p.19, 「김성희, 「오늘을 멀리 보기, 미래를 가까이 보기」」중에서
“우선 다원예술은 태도의 문제라고 보여진다. 장르 간 혼합이라거나 기능적인 다원주의적 실험이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다원예술은 세계관의 문제다. 예술의 종합이 시도되는 지점에서 ‘예술의 완성도를 제련하자’가 아니라, ‘예술 실천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굵은 질문을 재발명하는 것이다.”
--- p.19, 「김남수, 「‘다원예술’의 재명명 혹은 재발명」」중에서
“안무와 춤은 서로 너무나 다른 별개의 실천이다. 안무와 춤이 일치하는 경우에 안무는 춤을 추고자 하는 욕망의 분출 경로로 기능한다. 그렇기에 혹자는 안무적 경험의 본질은 오직 신체에 머무른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무가 신체를 빼놓고, 이를테면 ‘안무적 사물’을 통해서 자신의 원칙에 대한 자율적인 표현을 생성할 수는 없을까?”
--- p.40, 「윌리엄 포사이스, 「안무적 사물」」중에서
“그들은 저널리스트나 다큐멘터리 감독처럼 진짜 목소리를 찾는다. 아르헨티나의 잡역부, 바젤의 미니어처 기차 모델 조립가, 벨기에의 연설 작가, 취리히의 심장 전문의 등 실존하는 사람들을 경청하고 (‘프로토콜’을) 기록한다. 작업 과정에서 그들이 맡는 역할은 연출가보다는 관객의 위치에 가까울 지경이다. 이야기는 이미 발생한 상태다. 문맥을 부여하고 선택하고 집중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관객이 자신들만의 해석적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말이다.”
--- p.48, 「게랄트 지크문트, 「연극의 ‘전문가들’이 말하는 리미니 프로토콜」」중에서
“무용수들은 작업의 모든 면에 책임을 지고, 저는 제 이름으로 콘셉트를 제시하는 역할만을 수행하는 것이 제 이상이에요. 그들이 무용수로서 춤으로 된 주석을 달아 작품의 이야기를 끌어가고, 저는 그들이 안무 텍스트를 써내려 가는 과정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는 형태죠. 저는 해석자들이 제 아이디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자신만의 솔로 작품을 만들기를 바라요.”
--- p.54~55, 「제롬 벨, 「이메일들 2009~2010」」중에서
“반드시 극작가가 쓴 대본을 전문 배우가 공연장의 조건을 충족하는 공간에서 공연하지 않아도, 다시 말해 기존의 전통적인 장르의 방식으로 기획하고 창작하지 않아도, 연극일 수 있고, 공연일 수 있고, 예술일 수 있다는 가르침, ‘왜, 누가, 무엇을,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가설을 세울 수 있다면 예술에서 어떤 정해진 기준도 따라야 할 규칙도 없다는 가르침. 전통과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니 오히려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안에서 공연예술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고민에 더 방점을 찍게 되었고, 그 고민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공연 기획자로서, 시민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살고 창작하는 모든 시작점에 페스티벌 봄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68, 「고주영, 「페봄 키드」」중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개관 페스티벌에 참가한 작가들은 유럽의 식민주의가 소위 비유럽 국가들의 역사에 무엇을 기입하고 배제시켰는지 질문한다. 그 답을 구하기 위해 그들은 정치 , 경제 , 문화를 점령했던 그리고 점령하고 있는 특정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시간에 균열을 가한다. 그로부터 생성되는 새로운 지형 속에서 현재를 재구성한다. 오늘날 예술이 행하는 기억 행위는 현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미래의 시간을 구성하는 일이다.”
--- p.88, 「이경미, 「아시아의 눈, 역사와 사회를 향한 삐딱한 응시」」중에서
“영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꿈에도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 나는 인간의 몸이 항상 꿈을 꾸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나의 모든 작품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개인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고 언급했는데, 꿈은 그보다도 한 차원 더 개인적인 경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개인이 경험하는 꿈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대단히 깊은 의미가 있다. 따라서 꿈 그 자체가 자연스럽게 내게는 모티브가 된다. 영화와 꿈은 이런 점에서 연결 고리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 나는 영화가 다른 사람의 꿈을 관찰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믿는다.”
--- p.110,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열병의 방」」중에서
“페스티벌은 단순히 여러 작업을 모아 놓고 한꺼번에 많이 보여 주는 뷔페식 행사가 아니다. 그보다는 모든 것에 끊임없이 ‘왜’를 붙이는 개별 작업들과 구성원이 모여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공론장에 가깝다.”
--- p.169, 「김지선, 「왜」」중에서
“권태란 이 세계에 딱 맞는 시간이란다. / 우리는 과도한 자극에 끊임없이 노출되어서 / 자극이 없는 것은 곧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 그래서 나는 아주 정중하게, / 권태로울 수 있는 시간을 요구한다.”
--- p.176~177, 「엘 콘데 데 토레필,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가능성들」」중에서
“예술가가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형식은 항상 그 예술가가 예술에 관해 상상하는 바를 드러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울의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2018 ‘아시아 포커스’에서 만난 두 공연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극장의 개념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을 보여 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극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적 수단이 상상력을 만들어 내는 데 쓰여야 하는지, 아니면 실제 현실을 인식하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최근의 논쟁까지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 p.182, 「장크리스토프 브리앙숑, 「석화된 현실에서 경험된 초현실로」」중에서
“이제 ‘함께’하는 게 뭔지에 대한 공통된 이해부터 다른 방식으로 모색해 보면 어떨까요? 이를테면 비공동체적 공동체의 형태로요.”
--- p.197, 「르네 폴레슈, 「현혹의 사회적 맥락이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중에서
“오늘날 축제가 존재해야 한다면, 그 지향점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어떤 축제의 형식과 경험이 오늘날 유효한 방식이 될 수 있을까? 새로움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갈 방법은 무엇일까? 아직 예술에 미래를 그릴 힘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미래가 될 수 있을까?”
--- p.202, 「김신우, 「축제라는 항해, 그리고 우리 앞에 떠오른 것들」」중에서
“가능의 영역은 개연성의 영역이다.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아마도 이것이나 저것, 어느 정도의 가능성 등 언제나 이미 인식된 것, 상상 가능한 것 안에 있다. 잠재성은 이와 전혀 다른 것으로, 가능, 불가능, 인지나 지식을 넘어선 영역이다. 잠재성 안에서는 개연성이 분해되며 미결정성, 완전히 예측 불가한 것, 우발적인 것에 자리를 내준다.”
--- p.213, 「마텐 스팽베르크, 「필요」」중에서
“책을 아무리 많이 , 아무리 잘 외웠다고 해도 계속해서 ‘하지’ 않으면, 되풀이하지 않으면, 기억은 다시 사라져 버린다. 이 끊임없는 이어짐과 ‘하기’에 대한 헌신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인 것 같다. 이는 프로젝트의 전제이자 방법론이며, 시간이 지나도 계속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p.225, 「메테 에드바르센, 「단단하지 않은 공간」」중에서
“자신의 무용한 일에서 그 어떤 게으름의 흔적도 지우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예술가는 자신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진짜 게으름을 비출 수 있는 그 어떤 비판적 힘도 잃게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만다.”
--- p.232, 「보야나 쿤스트, 「예술과 노동」」중에서
“2000년대 초반에는 모든 예술 맥락에서 수행성이 중요한 화두가 되었고, 공연예술뿐만 아니라 모든 비엔날레, 미술관, 문학 축제에 수행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야 했다. 이 시기에 무용이 미술관에 진입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이 수행적인 것으로 포장되었다. 수행성은 꽤 자주 형용사로 쓰였는데, “그 작품은 약간 수행적이지.”라는 말은 마치 그것이 흥미롭거나 쿨하다는 의미로 여겨졌다. 수행성은 양적인 단위로도 사용됐다. 어떤 것이 더 수행적이거나 덜 수행적일 수 있다는 듯 말이다. 그런데 미안한 말이지만, 춤을 많이 춘다거나, 통통 튀는 걸음으로 걷거나, 과장된 표정을 짓는다고 해서 당신의 정체성이 더 수행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물질적인 것을 포함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의 정체성, 이를테면 의자, 도시, 역사적 사건, 무용 공연, 진료 예약 등은 수행적이다.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와 관계 맺는 순간, 수행성은 필연적이다.”
--- p.242, 「마텐 스팽베르크,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중에서
“현재중심주의를 탈피한 연극 ? ‘지금 아님-여기 아님’을 향한 연극 ? 을 목표로 삼는 것. 그럼으로써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한 연극에 이르는 것. 이 콘셉트는 작품이 상대하는 시간의 스케일을 바꿀 뿐 아니라, 작품이 상대하는 맥락이 겨냥하는 범위도 바꾸게 될 것이다.”
--- p.251, 「오카다 도시키, 「‘지금 아님-여기 아님’을 향한 연극」」중에서
“해결 불가능한 문제. 공간을 뒤섞고 꼬아 놓고, 사람들 옆에 남고 뒤에 남아 거리에서 사람들을 따라 흐르고, 사람들을 둘러싸고 비틀고 사로잡고 유혹하는 문제… 그러니까 유령과 뒤엉킴의 페스티벌. 꼬인 매듭의 페스티벌. 뒤엉킴과 물음들을 꿈꾸는 바보들의 페스티벌. 고뇌하는 자들의 페스티벌.”
--- p.286, 「팀 에철스, 「페스티벌의 알파벳」」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