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가 첨부터 그러라고 시킨 거야, 그냥 너희들이 알아서 핥는 거야? 병신 같은 새끼들…. 인생엔 이깟 군대생활만 있는 게 아냐. 인간세상은 다 마찬가지야. 잠깐 설치다가 골로 가는 거지. 너, 여기서처럼 사회 나가서도 그러면 맞아죽어.” --- p.152
난 이유 없이 네놈들의 가랑이 밑을 길수 있는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도대체 내가 왜 네놈 같은 것들을 감수해야 하지? 뭣 때문에? 제대를 위해서? 부모님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너처럼 병신 같은 새끼들에게 두드려 맞고 짓밟히면서 오직 시간을 견뎌 내는 것이 부모님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것이란 말이냐?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국가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며 적진으로 돌격할 수 있는 자는 먼저 ‘남자’여야 하는 거다. 군인이기 이전에 사나이여야 한단 말이다. 네놈은 지금껏 ‘남자’라는 게 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 …네놈이 6일 동안 그 지랄할 땐 그 못생겨 처먹은 면상에 제법 근엄한 표정을 짓고 군대 고참은, 어떻게든 시간만 때워서 가슴팍에 작대기 세 개만 달고 나면, 후임병들을 마음대로 폭행할 수 있고, 그렇게 두드려 맞는 이들의 고통을 즐길 권한이라도 가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겠지? --- p.174
“김철용 상병. 너 이렇게 살다가 사회 나가면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너도 사병인데 쟤나 내 꼴 안 된다는 보장이라도 있냐? 군대생활이 영원한 거냐? 네 영혼을 한번 생각해 봐. 인마.” --- p.203
그러고 깎은 듯이 앉아서 진종일 며칠째 쇠창살들만 관조하고 있자니 어느덧 그 자신이 철장 안에 갇혀 있는 것인지, 그 쇠창살 밖의 어느 작은 방에 앉아 있는 것인지, 쇠구슬을 철렁거리며 어슬렁대고 있는 내초와 가끔씩 들락거리는 헌병들이 큰 철장 안에 갇혀 있는 것인지 점차 헷갈리게 되었다. 또, 정찰대 병사들이 연회색막사의 울타리에 갇힌 것인지, 육군보병4사단의 모든 병사들이 거대한 철장 안에 갇힌 것인지, 이 나라의 국군전부가 엄청나게 큰 철장 안에 모조리 수감되어 있는 것인지 그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군인은 수감된 죄수인가? 병사들은 30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진 수형자들인가? 헌병대영창과 병영막사는 틀린가? 우리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이 나라의 남자로 태어나, 고교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범죄전과 없는 이들 중에서도 신체등급 1, 2등급 이상을 받아 현역입영대상이 됐던 것이 엄청난 범죄란 말인가? 이 나라가 채권자마냥 우리에게 강요한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한다는 것이 이렇게 개처럼 학대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달게 감내해야만 하는 것인가? 도대체 왜, 고참으로서, 헌병으로서, 간부로서, 장교로서 이토록 그 영혼들이 피폐해져 가야만 하는가? 혹 군인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통째로 우주만한 철장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는 그렇게 이제는 아무것도 이해 할 수 없게 되었다. --- p.212
군대에서 그는 점점 잔인해졌고, 타락했으며, 낙망과 절망으로 모든 게 허망해졌다. 자신이 너덜너덜해진 걸레 같았다. 그 중에 제일 지독한 것은 더러운 인간들과 같이 묶여 있다는 것이었다. 군대에 온 건 나 자신에 대한 포기가 아니었을까, 가지껏 경멸받아 마땅한 의타심이 아니었을까, 이런 게 나 자신에게 행한 범죄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렇게 그는 절치부심했다. 그는 다시 니체를 한 번 읽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가능할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는 그때엔 자신이 얼마나 더 엉망으로 망가져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 p.280
3개월을 넘게 당해보고서도 모른다면 30개월을 다 당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식이라면 평생을 살더라도, 아니 견뎌낸다 하더라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지금 당장 자유로운 영혼일 수 없다면 언제, 어디에서 그럴 수 있단 말이냐. 한 번 개처럼 길들여지고 나면 벌써 자유의지란 잃어버린 감각이 되고 만단 말이다. 미래엔 이미 존재하지 않을 그 자유를, 참아내고 기다리면 되찾을 수 있을 거라며 스스로를 속이고 근거 없이 위안하며 자기 자신에게까지 무책임한 머저리들아. 영혼을 지키기 위해 난 이탈(離脫)하련다. 너희들처럼 살기 싫다. 난 결코 그렇게는 살지 않겠다. 한 번뿐인 인생 난 제대로 살 테다…. --- p.297
근 두 시간여 만에 김계식은 출발명령을 내렸다. 푹 쉬었던 오기식과 김기진은 군장을 짊어지며 다른 이들이 저희들의 소견을 들어야한다는 듯 떠난 동기를 욕했다. “아서라, 들.” 이권휘가 그들의 입을 막았다. “갼 진지했던 겨. 모든 거에….” --- p.304
빽빽한 빗줄기 속에 그의 포효 같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나는 철장에 갇혀있지 않다. 이제 어디에다 라벨을 붙일 테냐?”
--- p.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