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범죄는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살인이다’, 기자 영혼을 때리는 죽비 같은 책
20년 가깝게 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뭔가 거창한 취재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욕심은 버린 지가 오래입니다. 취재하면 할수록 세상의 벽을 느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 기사로 뭐가 얼마나 바뀌겠어' 하는 무력감에 서서히 젖어 드는 과정이 바로 진정한 기자로 거듭나는 건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특히, 현장에서 성범죄 사건을 취재할 때마다 무력감이 든 적이 많습니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시각은 과거에 비해 줄었지만, 여전히 성범죄 기사는 단순 사건·사고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어섭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피해자들을 만나보면 감정을 최대한 걷어내고 기사를 쓸 때마다 죄책감이 들 정도입니다.
그들은 절규하고 있습니다. 애원하고 있습니다. 너무 억울하다고, 너무 힘들다고, 너무 두렵다고. 그런데도 기사에 담기는 피해자의 목소리는 고작 한두 줄입니다. 수습 시절부터 배운 대로 누구에게도 공명정대하게 피해자 측의 주장으로 담백하게 재가공돼서 말입니다.
그런 저에게 한 권의 책이 영혼을 때리는 죽비처럼 찾아들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는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살인이다.' 관심과 분노로 세상을 과연 바꿀 수 있을까, 어느 틈엔가 소명 의식은 사라지고 월급쟁이처럼 변한 제게는 꽤 묵직한 성찰의 주제를 던졌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영상물 등급위원회 등 방송·통신 관련 주요 기관을 두루 거친 미디어 전문가인 저자는 디지털 성폭력의 기원부터 현 범죄 양태, 제도적 개선책까지 책 한 권에 담아냈습니다. 첫 장부터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이른바 '엿보기' 풍습과 디지털 성폭력을 연결하여 관음증에서 비롯된 음험한 행위가 엄연한 성범죄로 인식되기까지 지난한 시간을 되짚었습니다.
특히, 이 책은 'N번방 사건'을 통해 그저 단순한 사건·사고로 치부될 수 있었던 신종 성범죄가 세상의 분노와 관심을 끌어내 결국 'N번방법' 마련 등 제도 변화까지 끌어냈던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텔레그램을 통한 성범죄자 '엘'의 등장을 꼬집으며 'N번방법'의 한계까지 지적했습니다. 딥페이크 등 신종 기술에 따른 제도적 미비 상황도 저자의 꼼꼼한 시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방대한 자료 수집과 체계적인 정리는 그야말로 '디지털 성범죄'의 교과서로 불릴 만합니다. 그럼에도 마냥 교과서처럼 지루하게 읽히지 않는 건 저자의 따뜻한 관심과 뜨거운 분노 덕으로 느껴졌습니다. 제가 취재 현장에서 마주했던 그 수많은 피해자의 절규와 애원을 저자는 외면하지 않고 이 한 권의 책에 담아냈습니다.
- 고은희 (KBS 기자)
무간지옥과도 같은 현실에서 피해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의 표현, ‘디지털성범죄는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살인이다’
SNS 덕분에 관심과 부러움이 넘실대는 가상의 인간관계가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애정 어린 관심도 적지 않지만, 의도를 드러내지 않은 어둡고 불량한 관심 또한 넘쳐나고 소비되는 요즈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심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저자는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사람들의 관심이 어떤 형태를 띠었고, 지금의 가상현실에서는 어떻게 진화하였는지를 꼼꼼하고 친절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디지털 세상에서 소비되는 관심이 어떻게 성 착취에 이르는지를 여러 사례들을 통해 명확하게 보여주며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관심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저자는 소비하는 가짜 관심이 아닌,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애정과 분노를 담은 진정한 관심을 촉구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고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해당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저자의 오랜 고민과 열정이 느껴지는 글들을 보면서 강단 있는 그의 비범함은 평소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관심과 자신의 분야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저자의 소중한 생각들
이 많은 이들과 함께할 기회가 되기를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바랍니다.
- 이동형 (법무법인 KNC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