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은 말 뼈다귀가 아니라 인재에 있다. 좋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뛰어난 인재가 선뜻 오지 못하는 까닭은 자신을 우대할 것인가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그보다 못한 사람을 먼저 모셔와 잘 대우하면 된다. 천금으로 말 뼈다귀를 사온 대목은 이것을 의미하며, 특출한 재능이 있지도 않은 곽외를 황금대(黃金臺)에 모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곽외가 특별대우를 받는 것을 본 인재들이 연나라로 모여들었다. 천금으로 말 뼈다귀를 사다’는 ‘천금매골(千金買骨)’ 또는 ‘천금시골(千金市骨)’이라고 한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인재에게 달렸다는 사마천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
간단하게 말해 하희는 적어도 ‘네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일곱 남자의 혼을 뺀’ 여성이었다. 기록에 남은 여성 가운데 하희만큼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여성은 없었다. 이 때문에 역사에는 “남편 셋, 임금 하나, 자식 하나를 죽이고, 한 나라와 두 명의 경을 망하게 했다”는 기가 막힌 오명 (?)이 뒤따랐다. 혹자는 장부(張負)라는 부잣집 노인(노파)의 손녀딸로 다섯 명의 남편을 잃고도 진평(陳平)에게 시집간 진평의 아내를 하희와 비교하기도 하지만, 파장이란 면에서 보자면 비교 거리도 되지 않는다. 하희의 무엇이 이와 같은 파문을 낳았을까? 단순히 미모 때문에?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무는 희대의 스캔들이었다. 하희 스캔들은 그 규모 면에서 상상을 뛰어넘는다. 여러 명의 남자들이 죽었고, 한 나라가 망했으며, 국제정치의 질서 및 사회의식이 바뀌어가는 서곡이었다.
*
항복한 장수 이릉(李陵)의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당한 사마천은 견디기 힘들었다. 궁형은 개인적 치욕이자 조상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었다. 망가진 몸은 불효의 표지였다. 공자의 도통을 계승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사(士’)의 유전자를 품고 있었던 사마천에게 이런 치욕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적 전통과 개인적 심리면에서 보아도 복수는 필연이었다. 요컨대 궁형의 치욕은 강렬한 복수 심리를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하를 일통(一統)한 절대군주에게 종법복수나 사림복수, 어느 것 하나 실행할 수 없었다. 피의 복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마천은 제3의 복수 방식을 찾아냈다. 대의를 행하되 유혈은 피하고 인생의 경지를 승화시키는 복수의 형식, 이것이 저술함으로써 울분을 발산한다는 ‘발분저술(發憤著述)’의 문화복수였다. 사마천은 《사기》 저술을 통해 전통적 복수관을 초월한 고차원의 복수 관념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를 통해 복수와 보상을 실현하고 정의의 구현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천하여 고귀한 정신을 청사(靑史)에 남겼다.
*
굴원(屈原)의 마지막 장면에서 핵심은 돌을 품었다는 ‘회석’에 있다. 아마도 돌을 몸에 묶었을 것이다. 그래야 떠오르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돌을 끌어안는다는 ‘포(抱)’나 돌을 묶는다는 ‘방(?)’이란 글자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사마천은 마음 ‘심?’ 변이 붙은 ‘회(懷)’ 자를 썼다. 여간 의미심장하지 않다. 돌을 안았거나 묶었겠지만 그 돌에 굴원의 착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지 않는가? 망해가는 나라에 대한 한없는 걱정, 회왕에 대한 안타까움, 간신들에 대한 증오 등등…. 온갖 심경이 정말 돌덩이처럼 굴원의 마음을 짓누르지 않았을까? 사마천은 이런 굴원의 심경을 헤아려 ‘회’라는 다분히 문학적인 글자를 선택한 것 같다. 그렇게 굴원은 자신의 착잡한 심경을 대변하는 돌을 몸에 묶은 채 서서히 멱라수(汨羅水)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가라앉아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까?
*
상술을 응용하여 정치 무대에 나선 것 자체부터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 결과 여불위는 천하를 상대로 도박을 감행하여 대성공을 거두는 전무후무한 사례를 남겼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안목, 수단, 지혜, 결단, 모험 등을 두루두루 보여주었다. 투자의 대상, 투자 시기도 적확했다. 변수가 발생하면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를 고려하여 제2, 제3의 예비 투자 대상도 정확하게 골랐다. 대비도 소홀하지 않았고, 위기다 싶으면 과감했다. 이 모든 것이 철저한 준비의 결과였다. 위기는 준비된 사람에게는 기회로 전환되며 행운도 준비된 사람만이 감지한다. 천하를 건 도박사 여불위의 전략은 안목과 준비에서 판가름 났다. 여불위의 투자는 초강국의 승상이란 벼슬, 문신후라는 작위, 낙양의 10만 호라는 어마어마한 이윤을 남겼다. 그리고 진시황이 성인이 될 때까지 휘하에 기라성 같은 인재들 3천을 거느리며 10년 동안 천하를 주물렀다. 사실 이것은 덤이었지만 그 덤이 천하의 경영이었다. 여불위는 천하 경영에 대한 수완도 보여주었다.
*
사마천은 다양한 고사를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재구성하여 한신의 죽음에 얽힌 중요한 진실의 두 자락을 들추어내는 데 성공했다. 첫째, 한신의 죽음은 그 자신이 자초한 면이 적지 않다는 것, 즉 한신의 성격이 권력자의 의심과 공신들의 시기심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위 고사성어 대부분에 한신의 ‘오만함’이 복선으로 깔려 있다. 둘째, ‘주인을 떨게 할 정도로 큰 공’을 세운 한신이란 존재를 부담스러워한 최고 권력자와 그 측근들의 모함이 작용했다는 점이다. 사마천은 최고의 개국공신이 어째서 삼족이 멸하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절묘한 방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팩트를 넘어 진실에 바짝 다가가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복잡다단한 인간의 심리까지 드러내는 탁월한 문학적 성취도 일구어냈다.
*
말이 나온 김에 〈조선열전〉의 중요성에 대해 알아보고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마쳤으면 한다. 대단히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이자 논쟁거리인 만큼 이후에 별도의 지면을 통해 상세히 밝혀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핵심은 〈조선열전〉의 중요성이다.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멸망했다고 알려졌다. 연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중요한 연도다. 사건의 전개는 이렇다. 기원전 109년 한 무제가 조선 정벌에 나섰다, 초기 전황은 조선에 유리했고, 협상이 오고갔으나 결국 조선의 내분으로 맥없이 멸망했다, 그해가 기원전 108년이다…. 그런데 그해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다름 아닌 사마천의 나이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에 태어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다면 기원전 108년은 우리 나이로 38세였다.
*
사마천은 관리들이 변질되어가는 모습을 〈혹리열전〉을 통해 적나라하게 펼쳐 보여주었다. 그에 앞서 모범 관리의 상을 배치하여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정당시(鄭當時) 역시 강직하고 청렴하기로는 급암(汲?)에 버금갔으나 스타일은 달랐다. 정당시에 대해 사마천은 이렇게 묘사했다. 정당시는 청렴하며 집안을 챙기지 않았다. 녹봉이나 하사품을 받으면 여러 손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그가 선물하는 것은 대나무 그릇의 음식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조회 때마다 틈나는 대로 무제에게 천하의 훌륭한 사람에 대해서 칭찬을 했다. 그가 관리를 추천할 때에는 항상 진지하고 흥미 있게 그 사람을 칭찬했고, 언제나 자기보다 훌륭한 점을 들었다. 관리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부하 관리와 이야기할 때에도 혹시 마음이 상할까 걱정했다. 또 좋은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무제에게 전하면서도 늦지 않았나 두려워했다. 산동(山東)의 모든 선비들과 여러 손님들은 이 때문에 하나같이 정당시를 칭찬했다. 사마천은 이 두 사람을 같은 열전에 함께 소개한 다음 이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급암과 정당시는 구경(九卿)의 지위에 올랐어도 청렴하고 사생활이 결백했다. 이 두 사람이 중도에 파면되자 집이 가난해서 빈객들은 하나둘 흩어졌다. 군 하나를 통치했으나 죽은 뒤에 남긴 재산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사마천은 혹리들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급암과 정당시의 열전을 안배하여 ‘모범적인’ 혹리 이미지를 먼저 제시했다. 이랬던 관리들이 욕심 많은 권력자와 얽혀 어떻게 변질되어가는 지를 그다음 편에서 보여주려 한 것이다.
*
〈화식열전〉과 〈평준서〉 이후 중국의 역대 관찬 사서에서 경제관과 경제사상은 자취를 감추고 그저 인구나 재정 상황 정도를 무미건조하게 기술한 ‘식화지(殖貨志)’ 정도만 남게 되었다. 적어도 이 점에서 중국 역사서의 수준과 역사의식은 《사기》보다 후퇴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늘날 〈화식열전〉과 〈평준서〉는 ‘기적의 저술’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아졌다. 말 그대로 2천 동안 저주를 받아온 명편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사기》의 가치와 사마천의 역사의식은 2천 년이 지난 지금 이 ‘저주 받은 명편’으로 인해 더욱 빛나고 있다. 부 에 대한 추구를 인간의 본성이라고 본 사마천의 경제사상은 지금 우리에게 부에 대한 성숙된 논의를 강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부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본성이라 배우지 않아도 모두들 추구할 수 있다. (중략) 농사를 짓는 사람이든,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든,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이든 이들이 재물을 모으고 불리는 것 역시 본래 재산을 더욱 늘리려는 것이다. 자신이 아는 것과 능력을 한껏 짜내서 무슨 사업을 이루려는 것은 결국 전력을 다해 재물을 얻기 위함이다. 〈화식열전〉에서 사마천은 경제가 의식을 지배한다는 ‘소박한 유물론’을 선보였다. 또 화폐관에 대해서도 진취적이었다.
*
사마천은 자신의 역사관이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온전히 받아들 여지지 않으리라 예견했다. 그래서 “제가 죽고 나야 시비가 가려지겠지요”라는 말로 그 파장을 예감했다. 이 때문에 한 벌 더 써서 감추어둔다고 했다. 또 누군가 첨삭할 것을 예상하여 글자 수를 52만 6,500자라고 밝혔다.(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기》에 손을 대어 보태거나 덜어냈다. 글자 수를 밝히지 않았다면 이것조차 밝혀낼 수 없었을 것이다.) 궁형을 자청하면서까지 역사서를 남기고자 한 데에는 다른 요인들도 작용했다. 첫째, 평생을 지켜온 자신의 지조다. 뜻을 세운 사람은 지조가 굳건해야 한다. 수시로 바뀌는 의지는 지조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조지훈 선생은 철들어 뜻을 바꾼 것은 다 변절이라고 잘라 말했다. 사마천의 지조는 고스란히 책임감으로 이어졌다. 그가 모진 풍파와 시련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숭고한 지조 때문이었다. 이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이라 할 수 있는 데, 그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역경을 극복한 선인들의 사례에서 용기와 격려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가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한 덕분이었다. 사마천은 이런 사례들을 관통하고 있는 고귀한 정신을 부각시켰다. 그 정신 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
명장 이광(李廣)은 강직한 성품 때문에 늙도록 승진도 못하고 정치군인들의 구박을 받았다. 이들은 이광의 사소한 실수를 구실 삼아 부하 장병들을 군법에 회부했다. 이광은 자신이 책임지겠다면서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심문당하는 것이 수치스러워 목숨을 끊어 군인의 명예를 지켰다. 사마천은 다른 정치군인들과 구별하여 ‘이장군(李將軍)’으로 높여 부르면서 그에 관한 열전을 남겼다. 이광의 일생과 인품, 그리고 그의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일신의 영달에 목을 맨 채 불법과 편법을 난사하고, 잘못은 떠넘기고 책임 회피에 능한 우리 지도층의 일그러진 모습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수치 불감증’이다.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사람을 가르치려면 반드시 부끄러움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부끄러움이 없으면 못할 짓이 없다”고 했다. 또 청나라 때의 학자 고염무(顧炎武)는 “청렴하지 않으면 안 받는 것이 없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못할 짓이 없다”고 질타했다.
*
궁형왕법(宮刑枉法),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것은 법을 잘못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한마디로 ‘억울하다!’는 것이다. 이 패방(牌坊, 패루牌樓라고도 한다. 우리의 홍살문과 비슷하다)에 그런 뜻이 숨겨져 있었구나! 모두들 무릎을 치면서 감탄했고 내 속에선 그 무엇이 치밀어 올랐다. 사마천의 고향 마을로 가는 입구에 버티고 선 ‘법왕행궁’ 패방은 그렇게 내 마음을 쥐어뜯어 놓았다. 하지만 누가 정말로 사마천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이것이 사마천과는 전혀 상관없는 유지이고, 또 멋대로 글자의 의미를 왜곡한 것이라도 해도 사마천이 당한 궁형의 억울함을 너무나 절묘하게 대변하고 기가 막히게 표현해준 것이 아닌가! 사마천 고향 마을 곳곳에 이런 기막힌 사연들이 남아 있었고, 이 패방 또한 단 네 글자를 통해 사마천의 억울함을 함축적이면서도 비통하게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