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도시재생을 통해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팽창과 건설에만 급급했던 도시를 구조조정 해야 한다. 주택계급화와 상업 트렌드의 변화로 공동화된 원도심을 어디서 올지 모르는 관광객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지역의 젊은이들이 떠나지 않고 거주하고 일하는 공간으로 바꿔야 한다. 인간의 노동을 AI와 로봇이 대체하고 사람들의 관계가 점점 비대면화되는 미래사회의 도시 생활에 대비해야 한다. 우리는 도시쇠퇴 문제를 국지적이며 현재적이며 외과적 문제로 보기보다는 도시의 소화 기능과 혈액순환, 면역체계가 약화된 총체적인 문제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도시재생은 쇠퇴해 가는 도시를 전반적으로 건강하게 재생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 pp.30~31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라는 말은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따뜻함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역설적인 것은 공동체주의의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진보 진영이 더욱 지지한다는 점이다. …… 공동체라는 말에 대한 선호는 ‘공동체는 마냥 착하고 좋은 것’이라는 오해를 통해 부정적 외재성을 무시하거나 은폐한다고 비판된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 우리는 동질성과 경계라고 하는 공동체의 구성 요건이 현대 사회의 자연스러운 현상인 이질적이고 다원적인 것과 어떻게 충돌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자본주의 도시에서 모든 기초적 공동체가 추구하는 친밀과 행복의 취약함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특히 쇠퇴한 도시재생마을은 재개발 추진 과정에서의 손바뀜과 갈등, 빈곤층의 이주가 많아서, 이질성과 이해 상충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점을 밝히고, 이러한 특징이 사업 추진 과정에서 어떻게 배타성과 공동체적 접근에 어려움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 pp.40~41
반대로 주거 전치의 문제를 다소 감상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1990년대 이래 재개발에 관한 비판적 시각의 대부분의 논문들에서 보이는 ‘원주민 재정착담론’은 그러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임하경·최열, 2009: 136). 이들은 ‘전면적 철거를 통한 주거환경개선이 기존 주민들의 삶터를 빼앗고 장소에 대한 기억을 박탈하고 풍경을 파괴했다’는 식의 관점을 유지해 왔다. 물론 이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당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유지와 투기를 병행하기 위해 이리저리 이사를 다녀야 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특히 저소득층의 주거 문제를 삶의 질의 문제로 보지 않고 기억의 문제로 보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특히 이러한 시각은 상대적 좌파들에게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면적인 철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도시재생을 재개발의 대안으로 지지하고 무조건 좋은 것인 양 환영하고 편을 드는 경향을 보였다.
--- p.212
중요한 사실은 현대 도시인 대부분이 공동체적 인간도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들만의 행복과 연고에 치우쳐 불공정을 일삼는 마을 내의 공동체적 인간들에 비해, 더 높은 시민의식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공동체 친화적이지는 않고 마을에서 필요를 구하지 않으며 마을에서의 실천에는 익숙지 않지만, 정의로운 시민으로서 촛불집회장을 묵묵히 채우며, 세계시민으로서 난민들을 응원하고 그들을 돕는 일에 적은 수입의 일부를 할당할 줄 아는 시민들이다. 비판적 소비주의(운동)에서 보는 것과 같이, 아무런 조직이 없어도 건강한 시민들은 불매운동을 통해 일본의 부당함을 응징하며, 구매운동(돈쭐)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받아들인 진천 군민들을 응원한다.
--- pp.360~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