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만 지내게 될 때 성격이 망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교수 중에서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줄곧 듣는데, 그건 교수가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발생하는 현상이다.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p.30, 「1장 〈교수라는 존재〉」 중에서
교수는 공식적으로 아무런 권력이 없으나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은 없고 자신의 말에 주위 사람들이 곧바로 움직인다. 공식적인 권력은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교수의 심리 상태가 권력자의 심리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자기 맘대로 해도 된다는 심리가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교수는 망가지기 시작한다.
--- p.34, 「1장 〈교수라는 존재〉」 중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강의교수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강의교수도 정년이 보장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잘 다니는 직장을 그만두고 강의교수로 오려고 한다. 그러나 교수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능력 있고, 인성도 좋아 보이고, 강의도 잘할 것으로 생각되어도, 이런 사람을 뽑을 수는 없다. 이 사람을 뽑아서 ‘직장을 그만두고 강의교수로 오라’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이 사람 인생을 망치는 짓이다.
--- p.55, 「2장 〈직장인으로서의 교수〉」 중에서
대학은 지식수준을 평가하는 곳이다. 소속 학과의 전문지식을 갖추었다고 판단되면 졸업시키고, 전문지식을 갖추지 못했다면 졸업시키지 말아야 한다. 태도가 어떻든, 얼마나 노력했든 관계없이 학생의 지식수준이 평가 기준이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수업 출석 상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게 원칙이다.
--- p.103-104, 「3장 〈교수와 학생〉」 중에서
연구비를 이용해 식사를 할 수 있고, 장비를 살 수도 있고, 더 많은 대학원생을 고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교수가 개인적으로 허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실 교수가 여러 프로젝트를 따오는 건 교수 개인에게 그렇게까지 좋은 일이 아니다. 버는 돈은 똑같은데 하는 일만 많아지니까. 그런데도 교수가 프로젝트를 더 따오는 것은 자기가 돈을 더 벌려고 하는 게 아니다. 할 수 있을 때 프로젝트를 수주해야 연구실이 제대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실상 교수들은 자신보다는 대학원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프로젝트를 따오는 것이다.
--- p.129-130, 「4장 〈교수와 대학원생〉」 중에서
박사학위는 논문을 어떻게 쓰는지 확실히 알고, 이후에 학술지 논문을 혼자서 문제없이 쓸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박사학위는 바로 그걸 보여주는 징표이다. 그러니 학술지 논문을 혼자서 쓸 수 있는 사람에게는 학위를 주고, 논문을 혼자서 쓸 수 없는 사람에게는 주지 말아야 한다. 박사과정을 오래 다녔다고 학위를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교수 아래에서 열심히 일했다고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p.134, 「4장 〈교수와 대학원생〉」 중에서
물론 교수가 논문에 관해 도움을 제공했다고 반드시 공저자가 되는 건 아니다. 연구주제, 방법론, 결과 등에 영향을 주는 경우에만 공저자 자격이 있다. 단순히 자료 수집을 도와주었다거나, 논평을 하더라도 주제, 방법론, 결과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수준이라면 공저자가 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박사논문은 주제, 방법론, 결과 모든 측면에서 교수의 의도가 개입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교수는 박사논문의 공저자가 될 자격이 있다.
--- p.147, 「4장 〈교수와 대학원생〉」 중에서
학교 내부든 외부든, 교수가 수업을 위해 일어나겠다고 하는데 억지로 붙잡는 경우는 없다. 다른 일 때문이라면 몰라도, 수업이 이유일 때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런데도 늦는다면 그 교수가 강의보다 다른 일을 절대적으로 우선했다는 의미이다. 교수도 월급 받는 직장인이기 때문에 어쩌다 한두 번은 그런 일정을 더 우선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럴 수는 없다. 이건 교수가 강의에 별 신경 쓰지 않을 때, 외부 사람과의 관계만 중시할 때나 가능하다. 다른 일 때문에 수업시간에 계속 늦는다면, 그 교수는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은 중시하되 학생들과의 약속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신경 써야 하지만, 강의 듣는 학생들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학생들을 무시한다는 뜻이다.
--- p.154, 「5장 〈교수의 생활〉」 중에서
등록금 동결은 학생들의 부담은 줄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 구성원들, 교수와 교직원들의 실질 소득은 계속해서 낮아졌다. 이런 처우는 앞으로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설사 이제 등록금 동결 규제가 풀린다 해도 다른데 메울 곳이 많아서 구성원들 처우가 개선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구성원들의 처우가 점점 안 좋아지는데 그 분야가 발달할 수는 없다.
--- p.194, 「6장 〈대학을 둘러싼 문제들〉」 중에서
오프라인 수업에서는 어쨌든 교실에 앉아있으니 좋든 싫든 교수의 말이 들린다. 교실에 앉아있는 동안 어쨌든 듣는 게 있다. 그러나 온라인은 그렇지 않다. 온라인 수업을 그냥 틀어놓고 얼마든지 딴짓을 할 수 있다. 1시간 동안 틀어놓았는데 하나도 듣지 않을 수 있다. 출석은 되었는데 배우는 건 없다. 온라인 수업은 스스로 열심히 하려고 달려드는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지 없이 졸업하기 위해서 수업을 듣는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다. 그런 학생이라면 오프라인이 조금이나마 더 도움이 된다.
--- p.204, 「6장 〈대학을 둘러싼 문제들〉」 중에서
과거에도 표절, 중복게재라고 비판받는 논문들이 있었다. 그런데 학술지와 학문분야가 완전히 분리되어있던 당시 상황에서 애매한 상황도 분명히 존재했다. 표절이 나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때는 무엇이 표절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20년 전의 논문을 가지고 표절이라고 비판을 할 때, 필자가 해당 교수를 비판하기 어려워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건 2000년 초중반 이전 논문에 한정된 설명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논문 검색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에는 학술지, 학문의 분리는 옛날 일이 되어버린다. 이때 이후 중복되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건 분명히 표절로 인정되어야 마땅하다.
--- p.222, 「7장 〈교수를 둘러싼 문제들〉」 중에서
필자는 이 점에 관해 분명히 단언할 수 있다. 고등학생은, 아니 대학생이라 하더라도 논문에 공저로 올라갈 수는 없다. 논문 과정에 참여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연구자들이 회의하는 장소에 참석했다 해도, 실험과정에서 도움을 주었다 해도 논문 공저자가 될 수는 없다. 일단 고등학생이라 하더라도 본인이 열심히 했다면 논문 공저자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논문 쓰기를 너무 간단한 작업으로 오해한 잘못에서 비롯된다.
--- p.237-238, 「7장 〈교수를 둘러싼 문제들〉」 중에서
사회에 새로운 지식을 전파해줄 수 없는 교수는 그냥 단순히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일 뿐이다. 그것도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이미 정형화되어 있는 대학 교재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이 추세가 지속되면 결국 교수는 중고등학교 선생과 별 차이가 없어지게 된다. 현재 교수의 위상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만한 가치를 사회에 제공하지 못한다.
--- p.251, 「7장 〈교수를 둘러싼 문제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