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사용된 ‘민중’이라는 말을 미학적 개념으로 던진 첫 발화자는 원동석이다. 그는 년에 발표한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에서 “민족의 실체는 민중이며 문화의 주체자도 역시 민중이다. 살아있는 민족 문화의 발현은 주체자가 스스로 민중이 되는 창조적 활동에 의해서만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중미술의 사례로 광자협의 ‘일과 놀이’ 미술 활동과 ‘시민미술학교’의 ‘시민미술’을 꼽았고, 또 두렁의 ‘산 미술’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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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과거에 대한 비판적 반성과 새로운 변혁의 장을 열려 했던 의미 있는 시간대였다. 미술이 주어진 현실을 적극 의식하는 그간의 익숙한 미술 어법에 대한 반성과 고민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등 국력의 신장, 경제적 번영 등과 함께 그 무대를 점차 국제 사회의 범위로 확장시켜 나가려 했다. 이런 전반적인 여건 속에서 동양화단은 국내 미술계의 자체적인 변화, 전통과 현대, 세계성과 독자성이라는 이중 삼중의 갈등과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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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미술은 대문자 ‘A’로 시작되는 ‘아트’에서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가. 여성주의 미술은 기존의 예술에 속하려는 노력보다는 여성적 현실과 문화 한가운데서 작업하고 운동했다. 여성주의 미술이 미술계에서 주목받은 것은 1990년대에 와서의 일이었다. 여기에는 김홍희를 비롯한 여성 기획자들의 힘이 컸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서 여성주의 미술에서의 방점은 달라진다. 1980년대 여성주의 미술은 삶을 변화시키는 문화운동에 집중되었다. 그녀들의 활동 무대는 전시장 바깥이 더 많았기에 ‘역사적 자료’에 대한 새로운 기준 설정이 중요하다.
--- p.215
80년대 소그룹은 모더니즘 회화의 평면성이 지닌 권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조형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할 형식을 선택한다. 당시 오브제를 사용한 설치 혹은 입체의 실험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그들 소그룹의 전시회의 모습은 분명 주목할 만한 시대의 정황이다. 그들은 또한 기존의 서로 다른 장르를 연계하거나 미술 창작의 소재로 사용되지 않았던 재료를 채택하거나, 혹은 전자 테크놀로지 미디어를 예술적 도구로 개발함으로써 70년대 모더니즘 회화에 억눌린 조형적 생명력을 다시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론을 다채롭게 제안하기도 하였다.
--- p.269
여성주의가 90년대 포스트모던, 다원주의의 흐름에서 나온 게 아니라, 80년대 중반에 당당하게 우리 사회의 변혁 운동 속에서 처음으로 싹을 틔웠다, 라는 부분이 강조가 많이 되고 있다. 그 최초가 반드시 멋있고 훌륭한 것은 아니다.
--- p.372
소집단 미술운동의 시대는 80년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 첫 번째 세미나 때 미술 경향을 4개 정도로 구분해봤다. 첫째는 표현의 확장과 탈모더니즘의 경향에서 ‘겨울 대성리’, ‘야투’, ‘3월의 서울’, ‘로고스와 파토스’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둘째로는 80년대 민중미술이 등장하는데, 현실주의 미학의 실천으로 ‘광자협’, ‘현실과 발언’, ‘임술년’, 미술동인 ‘두렁’, ‘실천’, ‘시대정신’, ‘서울미술공동체’, ‘민미협’ 등이 있다. 셋째는 극사실주의와 새로운 형상성 추구의 경향으로, ‘시각의 메시지’, ‘목판모임 나무’, ‘횡단’, 한강미술관의 기획전이 있다. 넷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초기적 양태로서 ‘타라’, ‘난지도’, ‘메타복스’, ‘레알리떼 서울’, ‘뮤지엄’, ‘황금사과’ 등을 꼽을 수 있다.
--- p.383
80년대 후반 미술계를 지배했던 소위 ‘탈모던’ 그룹들, 그러니까 타라, 로고스와 파토스, 난지도, 메타복스 등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면서 한국 현대미술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전시들이 기획됐다. (…) 이런 기획들이 87년에까지 이어져서 최정화 씨를 비롯한 뮤지엄 멤버들이 자기들의 언어를 가지고 나오게 되는데, 제가 봤을 때는 신세대의 새로운 감수성과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그러한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황금사과’나 ‘서브클럽’ 등 굉장히 실험적인 집단들이 나오게 되었다.
--- p.415~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