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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있던 나날,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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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1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364g | 135*200*30mm
ISBN13 9791193358184
ISBN10 1193358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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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나는 그냥 길을 잃은 아이가 아니에요. 왜 하필 지금 여기, 무서운 바이러스가 퍼진 곳에 와 있는지 모르겠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어떻게 해야 제가 살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네가 원래 살던 시간대? 길을 잃은 게 아니라고?”
유즈루는 머리로는 눈앞의 아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진지한 눈빛에 이끌려 되묻고 말았다.
“한 시간 전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데 제가 어떤 역 앞에 서 있었어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다 우리 말을 하고 생긴 것도 우리나라 사람들 같은데, 뭔가 너무 이상했어요. 무서워서 집으로 가려고 길을 찾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아줌마가 마스크도 안 하고 돌아다니면 어떡하냐고 화를 내면서 마스크를 주셨어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마스크를 쓰고 다시 걸었어요. 아무리 봐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고, 혹시 꿈인가 싶어서 뺨도 꼬집어봤지만 뺨만 아프고 절대 깨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여기 앉아 있었어요.”
아이는 거의 숨도 쉬지 않은 채 필사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유즈루와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동요한 상태임은 분명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도저히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 p.20~21

두 사람의 관계가 더 크게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6개월 만에 미쿠가 그 짧은 생을 병원 침대에서 마쳤을 때였다. 유즈루는 죽은 딸의 손을 잡은 채 오열했지만 사유리는 말없이 시선만 떨어뜨렸다. 그 눈에는 눈물조차 고이지 않았다.
“당신은 왜 슬퍼하지 않아? 왜 눈물도 흘리지 않아? 우리 딸 미쿠가 죽었어!”
애통한 마음에 유즈루는 사유리를 책망했다. 딸을 잃은 공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아내에게 화살을 돌렸다.
사유리도 절규했다.
“내가 슬퍼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내가 어릴 때 엄마가 심각한 병을 앓았던 적이 있어.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의사 말을 듣고 나는 매일 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었어. 다행히 엄마는 1년 뒤에 회복했지만 난 그때 어떤 운명도 받아들이겠다고 각오했어. 그러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으니까. 그 뒤로 나는 눈물 따위 흘리지 않아. 나는 그런 일을 겪으면서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었을 뿐이야.”
--- p.34

간신히 전화를 끊은 뒤 유즈루는 지코를 돌아봤다. 많이 기다리게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지코는 오히려 감동에 찬 눈으로 유즈루에게 다가와 말했다.
“진짜 끝내주네요. 생긴 건 네모난 초콜릿 같은데 진짜 전화기라니!”
“네모난 초콜릿이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이건 건전지를 넣는 거예요? 세 개? 네 개? 그래서 콘센트에 연결 안 해도 되는 거죠? 근데 이렇게 얇은데 대체 어디에 넣는 거지?”
긴 통화 내내 묻고 싶어서 좀이 쑤셨을 것이다. 질문 공세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아까 아무 소리도 안 났는데 전화가 온 걸 어떻게 알았어요?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화면이 움직여요? 사진은 필름을 넣어서 찍는 거죠? 네? 필름이 없다고요? 그럼 어떻게 뽑아요?”
--- p.48

“저는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너무 무섭지만, 그래도 아저씨랑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오늘 종일 같이 산책도 하고 얘기도 나누면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런 이상한 미래 세계에서도 평범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구나, 아저씨 같은 좋은 사람이 곁에 있어주면 괜찮구나 하고 안심했어요.”
지코는 힘차게 말하며 눈을 빛냈다.
“제가 여름방학 동안 미쿠를 대신할게요! 미래 세계에 있는 동안 아저씨 딸이 될게요! 미쿠가 열 살일 때 같이 하지 못한 걸 저랑 같이 전부 다 해요. 어때요? 우리, 여름방학의 추억을 잔뜩 만들어요.”
--- p.99

유즈루의 47년 인생 중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흉악 범죄가 ‘요시이케 지카 유괴살인사건’이었다. 수상한 남자가 지카에게 말을 걸고 결국 유괴한 것은 그날 같이 놀고 시설로 돌아가던 길이었다고 했다. 같은 반 남자애들의 짓궂은 놀림에 먼저 귀가한 유즈루와 마찬가지로, 지카도 5시가 되기 전에 혼자 시설로 돌아갔다. 그날 지카는 행방불명되었고 며칠 뒤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에 체포된 용의자는 어두운 인상의 30대 남자였다. 그러니까 유즈루가 지카와 만난 것은 고작 하루였다. 그것도 여럿이 함께 얼음땡 놀이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유즈루는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그 아이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초등학교 4학년 가을, 유즈루가 처음 느낀 사랑의 감정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그 감정을 느끼게 해준 사람을, 유즈루는 영원히 잃었다.
--- p.117

‘지코, 너는 어른이 될 수 없어. 이미 죽어버렸어. 이 미래 여행이 끝나면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대로 하늘로 올라갈지도 몰라.’ 마음이 너무 아팠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지코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 시절에는 같은 나이, 같은 학년이었지만, 지금 유즈루와 같은 나이의 어른이 되는 ‘미래’는 평생 오지 않는다. 미쿠와 똑같다. 영원히, 열 살 소녀인 채 그대로.
--- p.135

‘이런 시간이 소중했구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쿠가 곁에 있는 게 당연하던 그 시절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섰던 해수욕이나 캠핑, 이런 평범한 휴일, 평범한 시간들이 아빠와 딸 사이의 둘도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될 줄이야. 자판기 주스를 사달라고 졸라도 끝내 사주지 않았던 일, 아이스크림은 늘 제일 작은 걸로만 골라주었던 일, 그런 사소한 일들을 후회하게 되다니. 그래서 오늘 뒤늦게나마 조금 사치를 부리고 싶었다. 되새길수록 소중한 경험이었다. 너무 감상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렇게 지코와 하루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을 막고 있던 모래알 같은 후회가 파도에 쓸려가듯 사라졌다.
“지코, 목말 태워줄까?”
“네? 저 4학년이고 몸무게가 26킬로그램인데요.”
“20킬로대면 가볍네.”
“그것도 미쿠한테 해주고 싶었던 일이에요?”
“미쿠한테도 해주고 싶었고, 너한테도 해주고 싶어.”
--- p.199

그 순간 유즈루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잊으면 안 된다니, 왜 그런 말을 하니? 사랑과 추억이 담긴 은색 볼펜 한 자루만 남기고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니? 공원에서 유난히 빛나는 소녀를 발견했던 37년 전 그날도, 진짜 아빠와 딸처럼 여름을 함께 보낸 지금도 나는 너를 진심으로 좋아하는데.’ 잃고 싶지 않았다. 딸과 헤어지는, 몸이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여기에 있어줘. 미쿠처럼 떠나지 말고 계속…….’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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