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서 그는 우리의 계급 차이를 자신의 머릿속에 설정하는 데 필요한 모든 신호를 헤아려내고자 했던 것일까? 무슨 운명의 장난으로 자신은 왕세자로 태어나고 나는 특권 없는 평민으로 태어났는지가 궁금했던 걸까? 무슨 연유로 내가 그의 자리에 있지 않고 그가 나의 자리에 있지 않게 된 것인지를? 그는 나를 어느 다른 세상에 군림하는 분신 같은 존재로 보았을까? 아니면 이 세상의 아주 이상한 라이벌, 어떤 승리를 거두든 모든 승리가 그저 헛되기만 한 그런 이상한 라이벌 같은 존재로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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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파야! 사막과 대양의 변경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 추방자를 맞이하여 그의 마지막 야심마저 말려버림으로써 그의 오만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에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은 이 지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 p.87
왕은 바다를 마주하고서 걸음을 멈추었다. 바다를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돌아서서는 공모의 징표처럼 여겨지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영원한 공간의 무한한 침묵이라….” 그러고는 뭔가를 앙갚음하려는 듯, 톡 쏘는 듯한 어조로 덧붙였다. “이건 파스칼이 한 말이지, 그렇지 않은가?” 지금껏 왕이 보여준 친근한 태도에 대담해진 나는 시선을 의기양양하게 수평선에 고정한 채, 무례임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서 대답했다. 파스칼이 한 말이 분명하지만, 단어들의 순서가 좀 다르다고. 원래는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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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왕과 나, 우리 둘만 남았다. 왕이 말했다. “좀 전의 일은 참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네. 마음에 깊이 새길 가치가 있는 역사란 바로 이런 것이겠지. 이보게, 압데라마네, 내가 자네에게 큰 은혜를 입었어. 그 군인들이 나를 윽박지르려고 했다면 말이네. 사실 그럴 가능성도 다분했지. 하지만 왕국의 사료에는 이 모든 일에 관해 한 마디도 넣지 말길 부탁하네. 하기야 아무도 믿지도 않을 걸세.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얘기 아닌가.”
--- p.170
나의 능력에 대한 이 같은 오마주는 물론 나를 안심시키고 격려하는 것일 테지만, 이 표면적인 경의의 배후에서 나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 완벽한 짜 맞춤이 어쩌면 표적 조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무기의 조준장치에 맞춰 놓고 언제든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세심하게 고른 표적 말이다.
--- p.186
테라스의 드넓은 학식과 그가 내리는 판단의 섬세함, 모로코 왕국, 특히 모로코의 건축과 예술 관련 문화유산에 관한 그의 수많은 논문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건 부당한 일일 테지만, 그의 관점은 어디까지나 보호령 시대 프랑스 역사가의 관점이었다. 우리 민족주의자 지식인들은 그렇게까지 준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하고, 우리의 위인들을 알아야 한다고 알랄 엘 파시는 말했다. 그 위인 중에 물라이 이스마엘이 있었다. 그는 우리를 굴복시킨 이들의 눈앞에 던져진 권력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독립했고, 어쩌면 이제는 좀 덜 야만적인 상징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 p.191
“왕은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싫어해. 그와는 어떤 관계도 불가능하지. 수준이 좀 떨어지는 신하를 대할 때는 지적으로 자신과 대등한 사람을 찾으려 안달하지만, 정신적으로 자신에게 전혀 밀지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그를 없애지 못해 안달하지. 누구도 감히 그에게 그늘을 드리워서는 안 되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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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저는 좀 더 간소하고 단순하지만, 그 효과만은 뒤지지 않을 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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