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봄 통신
해변대로를 가운데 두고 이편은 바다와 허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저편은 번창한 도시이다. 이편 사람들은 저편 사람들의 모든 의미를 초월하고, 저편은 이편의 신비를 죄다 불신한다. 저편은 단숨에 소멸할 수도 있으나 영광을, 이편은 지리멸렬하나 장구한 전설을 소중히 여긴다. 이편은 어처구니없이 때늦은 순수를 발산하는 백발의 아이, 저편은 물을 뿜어 올리지 못해 싯누렇게 시들마른 상록수.
이편은 노인, 별것 아닌 사건과 이야기들로 가득 찼고 저편은 젊은이들, 수두룩하고 시끄럽지만 공허하다. 이편의 노인은 노상 벙긋거리며 뭔가를 동경하는 눈빛을 번쩍인다. 저편의 젊은이에게 긍정이란 미지의 낱말이고 현실은 거부의 객체이다. 노인은 회한의 한숨을 내쉬지만 단연코 우아하다. 젊은이는 휘파람 불 듯 욕설을 내뱉고 당연 천잡하다.
길이로 보자면 이편은 장대, 저편은 아이스케키의 막대기에 불과하다. 즉 노인의 시간은 길고 젊은이의 시간은 새벽의 일출 찰나만큼이나 짧다. 양쪽은 ‘영영 평행’으로, 다시 말해 ‘항상 나란히’인 채 오래전부터 지금에 이르렀고 앞으로도 여러 날의 매일을 지날 것이다. 어쩌면 이편의 세월이 무궁무진할 것도 같은 아둔한 환각이 들 때도 있지만 필연적으로 저편은 이편에 다다른다.
이편에 오면 저편에서 행사한 것이 착오와 무례와 비정함이었다는 걸 깨닫는데 그 각성이 수치심으로 둔갑할 때의 당혹감은 충격적이다. 한참을 당황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편, 바다와 허공이 대부분인 곳에서는 공유와 환대의 OTP토큰이 된다. 다시 말해, 수치심은 노인이 반드시 장착해야하는 필수아이템인 것이다. 노인은 이 수치심을 원동력으로 꽤나 긴 여정을 하고 바다와 허공에 섞여들면서 여정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홍로사과색 붉은 입술과 겨울밤의 숲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져본 적 있었음을 증명해주던 친구들이 여름날의 능소화라든가 가을 마로니에 잎사귀와 함께 투둑툭, 떠날 때마다 마음은 자꾸 헐렁해져서 마침내 텅 비어 그리움도 없어진다. 노인을 사로잡는 건 오직 기다림이다. 천천히 기울던 몸은 더 이상은 휘어지지 않고 바다와 허공에 걸쳐있다. 바다와 허공에 절반의 몸뚱이를 맡기고부터는 바다와 허공, 그 자체가 되고픈 동경이 간절하다.
꿀을 맛본 듯, 촛농이 닿은 듯 분명하게 드러내던 감성이 사라진다는 것, 검버섯과 주름투성이로 젖은 채 구겨진 신문지 같은 얼굴. 쇠약하고 굼뜬 팔다리…. 이 모든 게 노인에게는 너무도 다행이다, 축복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무슨 미친 소리냐며 날뛰는 저편의 젊은이여. 진정하게나. 그리고 차분히 생각해보게)
모든 역동하는 생명은 반드시 멈추는 시점이 온다. 사멸은 타고난 운명이다. 사멸의 시점에도 여전히 홍로사과색 붉은 입술에 숱 많은 검은 머리 그대로라면 그 용모와 에너지가 아까워서 어떻게 사멸할 수 있겠는가, 억울하게 절명하는 사형수처럼 피눈물을 흘리며 숨이 멎는 순간까지 죽기 싫다고, 죽을 수 없다고 바락바락 악을 쓰겠지.
이편이고 저편이었던 우리의 존엄은 우리 죽음이 위엄을 갖추었을 때 완성되는 거 아닌가. 저래서야 숭고한 사멸이 되겠는가. 우리의 소멸은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비로소 때에 이르러 정성을 다해 받잡고 기꺼이 소유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바다와 허공에 저편의 기억을 부드럽게 희석하고 자유로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노인은 그토록 소원하던 소멸을 맞이한다. 바다가 되고 허공이 되는 것이다. 젊은이의 소망에 따라 붙는 그 지독한 불확실성과는 달리 노인의 여정에서 이 간곡했던 소원은 너무나도 엄정하게 반드시 이루어진다. 소멸의 기쁨을 기다리는 것을 인내로 여기지 않고 즐길 수 있다면 노인은 인류 중에 가장 행복한 부류이다.
이편도 저편도 지금은 봄.
모진 추위도 찌는 무더위도 없이 취할 듯 살랑대는 바람에, 볕은 친절하고 꽃과 구름이 한껏 사치스러운 이 좋은 계절에 저편의 젊은이에게 이편의 노인이 안부를 전하는 바이다.
아울러 이 광활한 절대의 진리를 잊지 않기 바란다.
젊은이에게 노인이 가장 친애하는 원수인 까닭은 둘은 결국 같은 사람이기 때문….
---「에필로그」중에서
그의 이야기는 적잖이는 괴기스러웠고 적잖이는 감동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일본인 남자친구를 떠올리고는 말했다.
“복수 당하는 시간은 이제 그만 가지고 언니에게 조만간 회복했다고 알리세요.”
“진희는 내가 죽길 바라는 거 같아요. 그렇게까지는 아니면 좋겠는데….”
“그건 아니죠. 그랬다면 송여사를 오게 해서 구형석씨를 돌보게 하지는 않을 걸요.”
“송이 새벽에 와서는 진희가 여행을 갔다더군요. 진희는 내가 죽길 바라기까지는 않겠지만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은 할 거예요.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여행을 가겠어요. 집을 비운 사이에 내가 죽을 수도 있는데.”
“송여사가 잘 돌봐주니까 믿고 간 거죠. 이번 여행, 언니로서는 꼭 가고 싶은 것이었어요.”
“누구랑 어디로 갔담?”
“혼자 갔죠. 동경에 있는 친구의 초대를 받았어요.”
“아, 친구… 그렇군요. 어떤 친구? 기왕이면 남자의 초대면 좋을 텐데.”
그녀를 위하는 그의 아량이 참도 지극해 흥이 난 나는 얼른 알려주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맞아요. 남자친구 분이에요. 그 분이 멋진 집을 샀다는데 거길 초대했어요. 원래 사찰이었다니 나무가 많고 운치도 있겠죠. 크기도 상당할 거고.”
“남자요, 남자라… 그렇군요. 남자군요.”
그는 풀죽은 마른 목소리로 같은 말을 되뇌더니 돌연 서둘렀다.
“이제 그만 가 주시요.”
“그러죠. 너무 오래 끌지 마세요. 아무래도 남자친군데 언니가 그 분이랑 오래 친해지다 보면….”
화투판을 엎어버리듯 화드득 몸을 일으켜 세우며 그가 사납게 내 말을 잘랐다.
“그럴 일 없소.”
밤이 꽤나 깊었다.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게 잠이 들지 않는다. 구형석 씨로 인해 시한부의 비밀을 가졌으니 당분간은 그녀를 만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다. 구형석 씨가 사실을 알릴 때는 이미 들은 그의 진심을 내가 그녀에게 좀 더 자세히, 극적으로 말해서 그녀가 그를 용서하고 그의 사죄를 받아들이게끔 부추겨 그들의 화합에 크게 한몫해주어야겠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눈 번히 뜨고 있었다.
수요일 오후 2시,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특이한 일이다. 그녀는 문자하는 걸 질색해서 아주 간단한 말도 직접 전화를 한다.
‘지금 경찰에 신고했어. 재경 씨는 벌 받아야 해.’
이건 대체 무슨 말이야, 나는 급히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나를 노려보았는데 그 눈이 섬뜩했다. 욕실 문짝에 흰 종이가 투명 테이프로 붙여져 있고 거기에는 휘갈겨 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냐고 묻고 싶지? 당신이 예뻐서지. 예쁘다고 맘 내키는 대로 해? 일본까지 가서 남자를 만나다니. 돌아왔으니 이젠 어제의 즐거움에 값을 지불해야지. 지금은 흥분에 부푼 젖가슴을 꺼트리고 화끈거리는 아랫도리를 식힐 시간이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