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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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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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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2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236쪽 | 318g | 140*210*20mm
ISBN13 9788954690430
ISBN10 895469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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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한 대 얻어맞고 주변이 온통 깜깜해지던 그 순간 갑자기 무언가가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는, 그리고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그가 완전히 변화된 존재가 되기를 끈질기게 강요하는 이 새로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더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p.53

‘먼 곳에 있다’고 누가 그처럼 단정했을까? 언젠가 이미 말했듯이 그들 자신이다. 그들의 분위기와 상황, 여건 그리고 이야기와 소설이다. 어느 이야기 속에서 그들이 함께 길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어느 이야기를, 더구나 공동으로 체험하고 있다는 의식이, 집을 전혀 떠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멀리 와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 p.91

“내 이야기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아요.” 탁스함의 약사가 대답했다. “가끔씩 슬프게 진행되고, 때론 거의 절망적이기도 하지만 죽는 사람은 있을 수 없어요.”
--- p.104

그러던 어느 날, 밤바람 속에서 그는 실어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아주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계속 생각했다. 더는 말을 할 수 없다니, 잘된 일이야.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아도 돼. 이건 자유야! 아니 그 이상이지, 아주 이상적인 상태야! 정당을 하나 창설할까, 아니 차라리 신흥종교를 만들어? 말 못하는 자들의 정당, 말 못하는 자들의 종교? 아니지, 홀로 서야 해. 묵묵히, 자유롭게, 그리고 마침내 당연히 혼자서.
--- p.121

“그 ‘승리자’! 중세 서사시를 읽어서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호칭이나 이름은 때때로 정반대를 의미하지요. ‘승리자’는 그러니까 처음부터 ‘실패자’였던 거예요. 서사시의 비밀은 당연히, 언젠가는 모험이 무사히 끝나 ‘패배자’가 마침내 ‘승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승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녀가 그렇게 불린 것도,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거나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겠죠. 승리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실패자에게 정해진 운명이에요! 그리고 그 사이에는 어쩌면 모험만이 팽팽한 긴장을 일으키고 있는지도 몰라요.”
--- p.135

“당신은 그 실어상태를 떨쳐버려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당신의 무언無言이 오늘이라도 당장 당신을 죽일 거예요. 당신의 침묵은 결코 침묵이 아니에요. 비록 처음 얼마간은 당신의 의식을 확대시켜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혼자 있을수록 당신의 실어상태는 위험해지고, 급기야 생명까지 위협할 거예요. 실어상태가 계속되면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그토록 의미 있어 보이는 현재가 실현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모든 체험까지 거꾸로 거슬러올라가며 파괴될 거예요. 그렇게나 상징적인?어린 시절까지도. 그러면 당신의 기억은 무가치해지고 또 파괴되어버리죠. (……) 그러니 당신은 새롭게 말하려는 시도를 해야 해요. 새로운 단어를 찾아내고, 문장을 새로 만들고, 큰 소리로, 아니 소리라도 내보세요. 당신의 말이 비록 얼토당토않고 터무니없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당신이 다시 입을 연다는 사실이에요.”
--- pp.169~170

나는 그에게 자신이 그 이야기로 인해 달라졌는지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그동안 어디선가 나 자신에게 맹세한 적이 있었어요. 언젠가 내가 이곳으로 돌아올 때는 딴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하지만 유일하게 달라져 보이는 것은 커진 발이었지요. 그래서 신발을 새로 살 수밖에 없었고요.”
--- p.192

“중요한 건, 내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당신이 커다란 종이 위에 적어둔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헛일이에요. 나는 백지 위의 검은 글씨를 원합니다. 나는 내 이야기가 글자로 쓰인 것을 갖고 싶어요. 입으로 이야기할 때는 내게로 돌아오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글자로 쓰인 것은 다를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결국에는 나 자신도 내 이야기에서 뭔가를 얻고 싶답니다. 말과 글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들 하잖아요. 그 차이는 아주 중요하지요. 나는 내 이야기가 문자로 기록된 걸 보고 싶습니다. 나는 내 이야기가 쓰인 것을 볼 거예요. 그 이야기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과 나를 제외하면 대체 누가 그 이야기를 읽어야 할까요?” 내가 물었다. “상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른 개인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오직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 사람만을 위해 쓰이는 이야기가 오늘날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가 대답했다. “어쩌면 그런 게 바로 가장 근원적인 이야기가 아닐까요? 언젠가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되지 않았을까요?”
--- p.193

“그래요, 나는 내 이야기 도중에 몇 가지를 그르쳤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하더라도 뭔가 늦지 않고 제때 하고 싶답니다! 여기서 어느 곳에 서 있든, 어느 곳을 걷고 있든 나는 다음 모험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다음번에는 본질적으로 달라지기 위해서죠.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동경이라기보다는 탐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스승 파라셀수스가 버섯들에 관한 단상에서, ‘귀중한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자는, 바로 그 순간 벌써 또다른 귀중한 것으로 눈길을 돌린다’고 말했던 대로지요. 다만 나는 그 특별한, 까맣게 작열하는 출발점을 더이상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당시, 내 이야기가 시작되던 때, 그땐 발견했었어요. 그 출발점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내줄 수 있을 텐데!”
--- pp.195~196

이어진 노래는 오랫동안 준비되고 차분히 다듬어진 곡 같았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탈진상태가 되어 서로의 품에 몸을 던져 안겼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서로에게서 맛보았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나른함 속에 나란히 누웠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경탄 속에 깨어났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조바심으로 창마다 내다보았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인내심으로 계속 달렸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 사랑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에게서 자유로웠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에게 대담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에게 감사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를 인정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땀을 흘렸다,
소리를 질렀다,
울었다,
피를 흘렸다,
침묵을 지키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헤어졌다.
그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갔다,
말할 수 없음에 대하여
말할 수 없이 분노하며.”
--- pp.19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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