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네 말이 맞다.
나는 내 나라에서 쫓겨 났었다.
다시는 고국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매 맞으며 각서에 이름까지 썼었다.
그 일도 벌써 60년이 되어온다,
군의관이었던 신나게 젊었던 시절
혁대도 계급장도 구두끈도 다 빼앗기고
헌병 앞에서 수갑 차고 포승에 묶여
쓰레기같이 욕먹으며 산 어두운 감방
거기에는 희망의 끈이 한 줄도 없었다,
준비 없이 스산한 딴 나라에 가서도
더부살이 회초리를 세차게 맞아가면서
혀 빼고 눈감고 살기가 힘이 들었다.
들판 같은 외로움도 온몸을 할퀴었다.
그간에 고운 바람으로 네가 자랐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최근에는
죽기 전에 국적 회복을 하고 싶어
이 구청 저 주민 센터에 서류 제출하고
법무부 무슨 국에는 명예를 찾겠다고
내 간절한 이유도 길게 열심히 썼었다.
(살아온 내 한 생을 믿기 힘들어하는
아들은 한국 안과 학회에서 일간
각막 이식의 새 수술법을 소개하려고
외국인 학자로 강연 준비에 바쁜데
강연 중엔 나를 농담으로 언급한다네.)
그래 이젠 한마디 농담으로 끝이 나겠지.
그러나 아들아, 한 가지만은 믿어다오.
나는 절대로 고국에 죄짓지 않았다.
옳은 길을 가야 한다고 믿었을 뿐이다.
내 사랑이 언제나 밝기를 바랐을 뿐이다.
가거든 가슴 펴고 아버지 나라를 즐겨라.
그곳에는 좋은 바람이 많이 분 다더라.
새로 피어나는 고운 꽃도 많이 만나라.
젊은 날 내가 받았던 상처의 미친바람들
믿어라, 그런 회오리는 다시 오지 않는다.
---「바람의 이름으로_마종기」중에서
저 번개 섬광 보이지
이 천둥소리 들리리
승리의 환호 박수
환희의 완성 갈채
박수갈채는 하늘이 내리는
기쁨의 큰 파동 찬란한 광채
세상을 키워가는 힘의 원천
축복의 선포 열광적 환영이지
어둠을 사르는 생명의 불길
놀라운 성취의 엄숙한 합창이지
슬픔과 신음 아픔과 죽음은
사악한 욕망과 우상과 더불어
박수갈채가 뿜어내는 영광의 빛으로
자취도 없이 녹아 사라져 가리
저 환희의 섬광 보이리
이 열렬한 환호 들리지
누구를 향한 박수인지 알지
무엇을 위한 갈채인지 알리
---「박수갈채_이원로」중에서
새 한 마리가
꽃가지를 딛고 서 있다
부리는 벌써 꽃을 따 물고 있지
머리를 치켜들고 눈독 들인다
아마도 별을 쪼려나 보다
물은 꽃을 어쩌나 고민 중이리
대망은 참고 기다리는 계임
불굴의 의지가 보장은 아니지만
높이 솟아올라 때를 잡으려나
누구의 새인지
날갯짓 치기 시작이다
마중물을 붓는 거리
---「새」중에서
여리디여린 당신의 허리춤에 긴 마취침 놓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당신의 눈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손잡아주며
괜찮아요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그 순한 눈매에 맺혀오는 투명한 이슬방울
산고의 순간은 이토록 무섭고 외로운데
난 그저 초록빛 수술복에 갇힌 마취의사일 뿐일까?
사각사각 살을 찢는 무정한 가위소리
꼭 잡은 우리 손에 힘 더 들어가고
괜찮아요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편히 감는 눈동자 속에 언뜻 스쳐 간 엄마의 모습
몇 달 후 찾아와서 부끄러운 듯 내어놓은
황톳빛 비누 두 장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아기 먹다 남은 초유로 만든 비누예요
그때
손잡아주시던 때
알러지로 고생한다 하셨잖아요
혼자 남은 연구실에서 한동안 말을 잊었네
기어코 통곡되어 눈물, 콧물 다 쏟았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더 고맙습니다
---「비누 두 장」중에서
나의 천사
나의 아가야
널 낳을 때, 괴로움 다 잊어버리고
기를 때, 밤낮으로 그리 애를 썼건만
너는 왜 거기
진자리 마른자리 고단한 침대 위에
말도 없이 가만히 누워만 있니**
나의 천사
나의 아가야
이제 겨우 생후 9개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어여쁜 아가야
눈물도 말라버린 이 어미는
이제
너의 손을 놓으려 한다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가슴으로
이제
너를 보내려 한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하느님이 주신
네 심장과 폐, 간과 콩팥을 꺼내어
다른 아이에게 주려 한다
나의 천사
나의 아가야
미안하고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
고맙고 또 고맙다
나의 보배, 나의 전부, 나의 분신, 나의 천사여
그러나
나의 천사
나의 아가야
이제
우리 서러워 말자
너로 하여 다른 생명들이 다시 살 수 있다면
너로 하여 다른 어미들의 눈물이 마를 수 있다면
너에게는 또 다른 형제들이 생기는 것이고
나에게는 또 다른 너가 생기는 것이니까
이제는
푹 쉬려마
이 모질고 못난
어미의 품을 떠나
다시는 아픔이 없고, 눈물이 없는
우리 곧 만날 그곳에서
아가, 잘 자거라
나의 천사
나의 아가야
* 뇌사 상태로 고생하다, 모든 것 다 내어주고 떠난, 한 어린 영혼에게 바칩니다. 하늘로 돌아가 다시는 아프지 말라고 그렇게 기원해봅니다.
** 내 마음 둘 곳 없어, 엄마의 마음에 들어가고 싶어, 양주동 님의 “어머니의 마음” 노래를 일부 빌려 왔습니다.
---「나의 천사 나의 아가야*」중에서
수술을 위해
마취준비실에 들어오면
누구나 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가슴이 뛰는 소리가
천장을 울린다
아마도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심정이 이러하리라
분주히 움직이는 의료진 사이로
사뭇 흐르는 긴장감
말 못 하는 갓난쟁이의 본능적인 울음소리에
곱게 화장한 처녀 아이도
근육질의 헌칠한 총각 아이도
입 굳게 다문 중년의 아저씨, 아주머니도
머리 하얀 할아버지, 할머니도
천장만을 응시하다
호수처럼 눈물 고인
순박한 눈 꼬옥 감는다
어찌해 볼 수도 없이
엄습해 오는 공포, 이 떨림
하필 내가 왜
원망도 들 것이며
좀 더 잘해줄 걸
회한도 들 것이며
앞으로는 이렇게 살아야지
다짐도 할 것이고
부끄럽고 초췌한 마음
여기저기 빌어도 볼 것이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운명 앞에
홀로 마주 서면
착한 아이가 된다
그렇게
착한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걸 통해
착하고 아름다운 관계에 대하여
추억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내면의 소리에 비로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눈물의 의미’이다
---「이 눈물의 의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