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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1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40g | 125*200*20mm
ISBN13 9791193412084
ISBN10 1193412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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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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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글거리는 바람 따라 앞산에 갑니다

진달래 꽃망울이 영락없는 성냥알이네요

사나흘 봄볕에 그어 대면
확, 온 산을 태우겠습니다
---「꽃불」중에서

운다
숨바꼭질하던 손녀가
꼭꼭 숨어든 네 살배기가

눈물범벅 콧물 범벅
하얗게 질려 있다 깜깜
지워진 세상 헤어나지 못한다

고래 배 속 같은
어둠이 두려운 지니야
더 무서운 건 환한 세상이라는 걸
속속들이 발가벗겨지는 거라는 걸
알지 마라

네 눈동자 속 까만 머루알이
내 눈엔 없구나

못 찾겠다 꾀꼬리,
제 알몸 애써 안 보고 싶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지니야 나는
눈을 감는다
깜깜
---「깜깜」중에서

빛을 잃어 갑니다 그만 몸을 떨굽니다 화무십일홍, 영화가 길지 않다는 말인 줄만 알았습니다 꽃이 짧다는 말인 줄 까맣게 몰랐습니다

꽃은 향기가 그윽해 꽃일까요? 빛깔이 고와서, 모양이 예뻐서? 그러게요, 왜 꽃인 걸까요? 꽃을 보고 우는 사람 없습니다

사람의 재주가 꽃보다 더 꽃 같은 꽃을 사철 피워내지요 꽃을 보면 누구나 큼큼 코를 대지요 만져 보고 영원히 시들지 않을 조화엔, 절레절레 고개를 젓지요

꽃이란 꽃 죄다 집니다 담장 위 덩굴장미가 졌고 화단가 접시꽃도 집니다 시들기 위해 피어난 꽃, 열흘을 못 넘고 져야 꽃입니다
---「꽃이 집니다」중에서

노을반 아가 예닐곱
나들이 갑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행여 길 놓칠세라

가슴팍에 단 콧수건도 없이
기저귀에 지린 간밤처럼
애기똥풀 노랗게 번진 둑길을 갑니다
재활보호사 선생님 따라
병아리마냥
뿅 뿅 뿅 앞만 보고 갑니다

은빛요양원 언덕바지 개나리꽃
이미 졌고요
---「개나리꽃 이미 졌고요」중에서

물수제비뜨는 건너편 반백의 사내가
텀벙텀벙 건넜을 청춘처럼
하늘엔 구름 몇 조각,
불러 본다고 다시 노래가 되랴
시절이 다시 오랴
---「허밍」중에서

사람도 시절도
바람처럼 지나가 버렸네
계절만 오가고, 끝내 당신은 오지 않을
춘포역(春浦驛) 플랫폼
소리 없이 기적이 우네
---「춘포역」중에서

늙은 짐꾼은 짐이 될 뿐
이미 아무도 짐을 주지 않는다

(중략)

평생 짐 졌던 자는 안다
빈 지게가 더 무겁다는 것
---「포터 마하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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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바람처럼 지나가”(「춘포역」) 버린 사람과 시절에 대해 노래한다. 피는 꽃이 아니라 시든 꽃에 더 자주 눈길이 간다. “별이었다가 달이었다가 다시 티끌이 되어”(「지나간 사람」) 소실점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가 버린, 다시 오지 않을 청춘의 시간에 대한 탄식과 회한과 최루성 감상과 지향 없는 자기연민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시인은 화무십일홍이란 말을 ‘열흘 넘기지 못하고 시들어야 비로소 꽃’(「꽃이 집니다」)이라고 재해석한다. ‘늙어 감’에 따라 얻은 새로운 눈뜸이며 시야의 확대라 하겠다. 그러니까 시인은 나이 듦의 숙명적 체험 속에서 차고 기울고 다시 차오르는 우주의 순환질서, 원리와 섭리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편 갈피 갈피에 묻어나는 서정성은 여전히 분홍빛이다. 촉촉하다. 윤기가 자르르하다. 시인의 촉수는 더욱 정밀하다. 시안은 웅숭깊다. 돌절구에 봉숭아 꽃잎 찧던 그 시절이 떠올라 봉숭아꽃 보면 가슴이 위봉폭포 소리보다 더 쿵쿵거린다. 나이 먹지 않았더라면 어찌 그 절절한 서정의 감각과 언어를 익힐 수 있었으랴. 세내 산책길에 “행여 밟힐세라 집 없는 달팽이를 풀숲에 데려다”(「6월 7일, 비」)준다. 과거를 돌아보니 역설적으로 ‘지금 여기’가 확고해진다. 이제 바라보는 모든 것이 애잔하다. 애절하다. 간절하다. 다시 올 수 없음을 이제 몸으로 알겠기 때문이다.
- 복효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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