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 터널의 숲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 위로 저녁놀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와 김시운을 깔아뭉개고 저 멀리 달아나고 있다. 그는 사선 아래 모래밭에 피투성이로 으깨져 누워있다. 아, 거기에 내가, 데이빗이 또한 피투성이로 누워있다. 그러자 문득, 이 낯선 여행길을 언젠가 내가 똑같은 모습으로 지나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버스와 승객들도 그때의 그 사람들로 신기하게 낯이 익었다. 그때 김시운의 자살도 내 눈으로 보았었고 이제야 동일한 장면이 현실로 재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시감, 버스에 앉아 구찌의 저녁놀을 보는 내 모습도 과거에 보았던 기억의 재현이었다. 이 낯선 시간이 전혀 낯설지 않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낯선 시간 위에서」중에서
한 주일을 치른 화마이 데불람 작전 이후,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은 중대는 기진맥진하고, 침울하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장태산의 증세는 더욱 심했다. 대개 점심식사는 상황실에 모여 장교들끼리 하건만 장태산은 전령을 통해 몸이 불편하다는 전갈 한마디를 던지고 며칠째 상황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대에서 날아오는 정보나 잠복초의 배치 문제로 그를 부르면 그는 마지못한 듯 상황실로 왔는데, 권총탄띠나 철모도 없고 정글화는 끈을 매지 않고 질질 끌고 있었다. 그의 눈은 암울하게 희번덕거렸고, 볼은 꺼졌고, 입술은 꺼멓게 말라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맑고 선홍빛이 돌던 피부는 어디로 갔는가. 그의 얼굴은 잿빛 어둠이 깔려 칙칙해 보였다.
---「후에에는 눈이 내린다」중에서
본관 계단을 내려서며 문과대학 쪽을 쳐다보았다. 녹물 흘러내린 갈색 석벽에 앙상한 담쟁이 줄기가 깡마른 늙은이의 혈관처럼 불거져 늘어붙어 있다. 그 지하실, 과 연구실에 모여 문예사조를 정리한다고 졸라의 ‘목로주점’을 가지고 끝도 없을 듯 언성을 높여 토론하던 기억이 났다. 어둠이 내리고, 추위와 허기에 쫓겨 껌껌한 복도를 걸어 나올 때의 구두 발짝 소리의 울림, 달콤하게 느껴지던 피곤과 무언가 학문적 형체가 잡혀가고 있다는 즐거움, 교정을 일시에 바닷속의 신비로 몰아넣던 푸른 달빛……. 이런 감상적 분위기를 왈칵 뒤집으며 대장 격인 김일근 선배는 늘 소리 높여 고함질렀다. “배고픈 드라큘라들아! 오늘은 무얼 잡아먹는다? 생과부년? 생피 뚝뚝 흘리는 아다라시?” 그리곤 곧장 빈대떡집으로 가 막걸리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뿔뿔이 흩어졌었다.
---「이양선異樣船」중에서
“자 봐라. 골패의 요 구멍을 통이라 해. 두 통짜린 통코, 네 구멍짜린 지나, 여기 열두 통짜리 있지, 이건 줄육…….”
할머니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골패놀이를 가르쳤다. 32쪽 골패가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놀이를 하는 것인지 처음 알았다. 나는 사실 할머니의 말을 듣는 체만 했지, 결코 민속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골패를 배울 의도는 없었다.
“야, 잘 봐. 요렇게 짝 맞춰 나가다 보면 요렇게 떨어지지. 요게 홀쌍소다. 이건 활개 치고 나다녀도 걸리는 것마다 재수다. 요렇게 떨어지면 쌍소…….”
“할머니, 옹녀, 춘향이, 심청이, 장화 하던데 그건 뭐야?”
“요망한 것. 별걸 다 귀담아들었구나. 그건 할미가 새로 맨들었다. 삼십 년 골패 하다 보니 이젠 내가 맨들어 하는구나. 남자들 노는 건 싱거워. 내가 맨든 게 재미있지. 호호호호.”
드디어 할머니가 활짝 웃으셨다. 그래서 내 목적은 달성된 셈이 되었고 이젠 다 배웠다는 거짓 너스레를 떨며 이불을 폈다. 그날 밤엔 할머니는 수면제도 안 드시고 온화한 얼굴이 되어 자리에 드셨다.
---「골패」중에서
나의 베또집 출입은 꽤 잦은 편이었다. 거의 한 주일에 한두 번은 그곳에 출입하고 있었다. 오피가 반경 150미터의 철조망 쳐진 감옥이라면 밤에 4킬로를 걸어야 당도하는 베또집은 천상의 구원이었다. 김 형의 끝없는 전화 호출도 있었지만 적 지역의 호기심도 사라지고 일상적인 집단농장의 중노동만 관측하기도 지겨웠다. 한정 없이 임진강을 가르고 부는 겨울바람과 설산을 비추는 황량한 만월은 나를 고독 속으로 응집시키다 못해 짐승처럼 포효라도 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했다. 300미터의 바운다리를 랜턴을 들고 미친 듯 뱅뱅 돌다가 드디어는 사병침실의 양 하사를 조용히 불러내고야 마는 것이었다. 양 하사는 알았다는 듯 실내관측실로 들어가 충실히 내 임무를 대행했다. 긴급보고나 수시보고까지. 그리고 나는 새벽녘이 되어야 기진해서 되돌아오곤 했다.
---「임진강」중에서
그가 떠올리는 분위기는 유귀적이고 신비로운 마력이 있으면서도 그것이 몽상이라기보다 어떤 질서와,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논리 같은 것이 깔려 있어 나를 겁주곤 했다. 아, 그 괴이한 논리를 펼치기 전에 변하는 그의 표정이라니. 골똘한 집념에 잠겨 눈그늘이 짙게 깔리고, 어둠 속에서 섬광 같은 것이 튀었다. 그 섬광이 스치고 나면 얼굴에는 더욱 짙게 어둠이 깔려 딴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신들린 무당의 표정이 그런 것일까. 그때의 그는 영은 어디로 떠돌고 육체만 남아 있는 것처럼 숨소리조차 사라진 듯했다. 인도의 요기들이 말하는 유체이탈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空과 色의 그림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