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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는 시간

: 기억에 관한 짧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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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1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04쪽 | 128*188*20mm
ISBN13 9791197679735
ISBN10 1197679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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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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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아침 해가 밝아 올 때까지 얘기를 나눴다. 바싹 야위었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던 아버지를 함께 떠올렸다. 별로 다정하지는 않았어도 각자의 기억 속에 뭉클한 이야기 하나쯤은 남겨 준 아버지를 생각했다. 물론 당신 인생에 맞서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져 간 아버지 때문에 엄마와 우리 인생도 힘들었다는 원망도 했다. 아버지가 그때 조금 더 힘을 냈더라면, 그래서 그렇게 인생을 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도 좀 달라졌을까.
---「자매가 나누던 이야기」중에서

우리는 나오는 길에 잠깐 차를 세우고 근처 개울로 내려갔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좀 닦고 싶었다. 개울로 내려가 손을 담근 그 순간 물이 어찌나 차고 시원하던지 언니와 나는 삼베 치마저고리가 다 젖도록 정신없이 물을 퍼올려 세수를 했다. 손과 얼굴을 닦고 마른 먼지가 땟국물처럼 엉긴 목덜미도 씻어내는데, 그때의 기분을 지금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엄마는 돌아가셨는데, 4월의 꽃은 만발하고, 흐르는 봄날의 개울물은 말할 수 없이 시원하고.
---「그곳의 풍경」중에서

꼭 떠나겠다, 마음먹고 떠나온 고향이었다. 그런데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사람도 도시도 온통 낯설고 무서웠다. 길을 건너기 위해 지하도에라도 들어가게 되면 한 번도 원하는 곳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올라갔다를 반복하다 보면 자존감이 무너졌다. 길도 못 찾는 바보가 되어 무한 반복의 궤도에 갇힌 기분을 느낄 때도 있었다.
---「완벽한 하루」중에서

어느 날 코끼리 한 마리가 빛과 바람 속에서 서서히 삭고 있는, 이제 더 이상 누군지 알 수 없는 뼈에 다가간다. 코끼리는 긴 코로 기억을 더듬어 빛바랜 뼈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이곳저곳, 구석구석을 천천히 어루만지고는 크게 울음 운다. 뼈의 주인은 오래전 이곳에서 생을 마친, 수코끼리의 가족이다. 어느덧 자라 무리를 떠나 홀로 떠돌던 젊은 수코끼리는 잊지 않고 찾아와 그를 기린다. 그렇게 오랜 시간 쓰다듬고 어루만지던 젊은 수코끼리는 뼈를 두고 다시 혼자만의 길을 떠난다.
---「어쩌면, 코끼리처럼」중에서

이별은 천천히 찾아왔다. 다툼도 미움도 없이 그냥 조금씩 멀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면 나와 그 사람의 시간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김승희 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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