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내발성의 차원에서 우리 사상을 들여다보면 서구의 체계화되고 잘 정립된 여러 사상 속에서도 단절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온 하나의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의 기원은 19세기 중엽(1860년 4월)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에서 비롯되며, 이후 최시형, 손병희를 거치면서 변주·확산되기에 이른다. 동학은 종교이지만 신 중심이 아닌 인간을 본(本)으로 하는 하나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학은 인간 중심 사상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포괄하는 보다 너른 차원의 ‘생명’ 중심 사상으로 나아간다. 서구의 다른 종교나 사상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이 생명에서 발생한다. 생명에 대한 규정과 해석으로부터 새로운 사상이 탄생한 것이다. 동학이 기반이 된 이 생명 사상은 내발성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한국적 사유 체계의 탐색이나 대중에 기반을 둔 사회 변혁적인 운동의 형태로 계승되기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 생명 사상은 우리 민중의 집단적이고 역사화 된 의식의 내발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명에 대한 지극함을 드러내고 있는 불교, 도교, 유교와 같은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은 물론 서구의 신과학운동을 포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생명 사상의 계보와 문명사적 전회」중에서
그늘과 흰그늘의 대비는 그의 미학적 이념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미학적 이념은 그늘과 흰그늘의 분리·대립이 아니라 그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다. 따라서 흰그늘은 그늘의 연장이면서 승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렇게 흰의 존재성을 강조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글이 「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이다. 이 글에서 그는 빛, 다시 말하면 흰을 “아우라(aura)”라고 명명한다. 그가 이렇게 아우라를 강조하는 것은 그가 생명을 강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실존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이 불러온 사회·문화와 예술·미학 차원의 변화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 중의 하나가 아우라의 상실이다. 아우라의 상실은 인간을 점점 왜소하게 만들어 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박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생명 가치의 상실이나 그늘의 지극함과 숭고함의 상실이 만연한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회복하려는 그의 의지가 표출된 것이 아우라 혹은 흰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
---「'흰그늘’의 미학과 예감의 우주」중에서
‘지금, 여기’ 우리의 놀이판은 마당보다는 방, 몸보다는 뇌, 신명보다는 카타르시스, 아날로그보다는 디지털, 주체보다는 구조(체제), 공중(public)보다는 대중(mass), 사람보다는 자본, 영성(靈性)보다는 물성(物性), 지각보다는 감각을 지향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이 흐름 속에서 그것에 동화되기도 하고 또 그것에 저항하기도 하면서 각자가 향유하는 놀이를 통해 신명풀이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각자가 어떤 놀이를 향유하는지는 취향의 문제이지만 문화가 놀이 속에서 놀이의 양태로서 발달해 온 점을 고려한다면 어느 한 문화의 ‘퍼스펙티브(perspective)’와 ‘지평’을 위해서 그 문화의 정수를 들여다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놀이, 신명(신명풀이), 몸’을 우리 문화의 원리로 이해하고 그것을 토대로 우리 문화의 과거, 현재, 미래를 성찰할 때 비로소 한국 문화의 전망과 지평은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놀이, 신명, 몸이라는 우리의 문화 원리가 단순히 한국적인 특수성을 넘어 어떤 인류사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금, 여기의 여러 문화 현상 속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우리 문화를 위해서도 또 세계 문화를 위해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놀이, 신명, 몸」중에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은 신이 한다는 말이 있죠. 무슨 뜻일까요? 지금 우리가 그런 본질적인 생명의 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천재지변이 나고 전혀 예상도 못 한 우박과 폭설과 물난리가 나고 그런단 말이죠. 물이 토네이도를 만들면서 하늘로 큰 기둥처럼 솟았다가 갑자기 마을 밑으로 내리 때려 그 밑동을 파버리는 거예요. 박살이 나 버리는 거야. 이번의 수재, 물론 인재야. 수백 개의 나무들이 물결과 함께 서서 왔다고 그래요. 물이 산을 넘은 거예요. 이 정도면 이건 물난리라고 볼 수 없다고. 이건 지옥이야. 그러면 쓰나미 같은 화산, 지진, 이건 지구 자전축이 이동한다는 얘긴데, 해수면 상승, 이건 날이 갈수록 더한단 말이지. 온난화, 이런 현상들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제까지 낙관적으로 보아왔든 제임스 러브록 같은 생태학자들도 이 현상을 보고 ‘가이아의 복수’라는 말을 했어요. 가이아가 자기보존을 포기했다는 거예요. 이거 무서운 얘기 아닙니까? 그러면 이런 걸 보고 우리가 그때 각성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수십억이 다 죽고 결국에는 북극이나 고산지대에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 그러면 각성이라는 것이 와야 하는데 그런데도 각성을 못 해요.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