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우리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적인 권위는 스스로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존재적으로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외계인이나 진화적으로 뛰어난 존재가 나타나면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의 권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피조물을 다스리는 사명을 신으로부터 위임받았다는 데서 비롯됩니다. 왕의 칙사가 가진 왕과 같은 권위입니다.
---「38쪽,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거늘’」중에서
소크라테스는 태연하면서도 기쁜 낯으로 독배를 들었습니다. “그는 전혀 두려움이 없었고, 그의 말과 태도는 고귀하고 우아했으며, 축복받은 자의 모습으로 죽었습니다.”(파이돈의 말)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 신들의 왕국인 천국에 들어간다는 확신과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2세기의 기독교 변증론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소크라테스를 신의 로고스를 따라 살았다는 이유로 ‘그리스도 이전의 기독교인’이라 불렀습니다. 이에 더하여 영원한 세계에 대한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불려도 무방할 것입니다.
---「57쪽,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도킨스는 이 모습을 보며 신이나 우주에 어떤 계획은 없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습에서 하나님의 섬김을 봅니다. 하나님은 물질이나 생명체가 어떤 지시도 없이 단지 자기 삶에 충실하게 살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들은 본능을 따라 주체적으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조화로운 생명체가 나오고, 인간이 출현하고, 사랑이나 정의나 아름다운 것들이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어떤 계획으로 우리를 강제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 실수나 시행착오도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이 나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가 그 바탕에 있습니다. 섬김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존중이 관계를 조화롭게 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136쪽, ‘섬김의 리더십’」중에서
요한복음 서문에서 이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성육신 선언을 하였지만,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성육신의 절정입니다. 가장 무력해진 순간, 가장 고통스런 순간, 가장 비참한 이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한계와 연약함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짜 인간이 되셨습니다. 아니 진짜 인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이 아닌 ‘동료 인간’으로서, 인간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한 한 과정이었습니다.
---「313쪽, ‘에케 호모, 보라 이 사람이다’」중에서
사랑받은 제자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받은 제자’라 불리기를 좋아했고, 요한 공동체에서도 스승을 그렇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쿰란 공동체라고 유대의 광야에서 수도원 운동 비슷하게 활동했던 엣세네 파라는 그룹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조직을 창시했던 사람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 창시자는 단지 ‘의의 교사’라 불릴 뿐입니다. 아마 ‘하나님의 의’에 관심이 있고 의롭게 살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사랑받은 자 요한은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자로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요한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사랑합니다. 제자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사랑이 이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심장입니다.
---「389쪽, ‘그의 증언은 참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