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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 여인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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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1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246쪽 | 130*192*15mm
ISBN13 979118614279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내가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다시 횡단 보도를 건넜다. 어느 상점은 가게 앞 나무 전체에 작은 전구를 달아놓았다. 수백 개의 전구가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캐럴이 울리는 번화가 골목을 이리저리 쏘다녔지만, 실은 갈 곳이 없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젊은 남자가 무심결에 내 어깨를 툭, 치면서 지나갔다. 모자를 쓴 남자는 행인들 틈에 끼어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모자가 저 홀로 멀어져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나는 그 남자의 뒤를쫓아가고 싶었다. 어디 좋은 곳에 잠시 들리지 않겠어요? 하고 팔짱을 끼고 싶었다.
--- p.86

남편이란 아내와 이백 년을 살아도 그 마음을 모르지. 우주의 거리는 이해할지 몰라도. 독백 끝에 말론 브란도가 자신은 마흔다섯 살이라고 말한다. 마흔다섯 살. 마흔다섯 살. 마흔다섯 살이면 아내가 자살한 날 낯선 어린 여자와 격렬하게 뒹굴 수도 있는 건가. 나는 가슴을 부풀리며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간 남편을 둔,쉴 새 없이 입에 무엇인가 집어넣고도 배가 고파 어쩔 줄 모르는,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떠돌다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관능적인 영화를 보는, 마흔다섯 살인 여자를, 그 여자 인생의 한순간을 생각했다.
--- p.91

얼어붙은 바닥을 쾅쾅 울리면서 나는 뛰어갔다. 입에서 나온 하얀 김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공중전화는 아파트 단지 후문 옆에 있다. 주머니를 뒤졌다. 아무것도 없다. 주머니를 거꾸로 털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직도 외우는 이강유 번호를 꾹꾹 눌렀다. 수화기 너머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이강유. 나는 다짜고짜 그에게 소리 질렀다. 조금 전 들었던 노래에서 소리 지르는 아이들처럼 배에 힘을 주고 고함을 질렀다. 이강유! 경아 엄마처럼 차가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경아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데 동전이 없다.
--- p.118

언제부터 술을 마시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작정하고 마신 것은 아니었다. 그냥 조금씩 늘었다. 남편은 회사 경영에 목숨을 걸었고, 그러므로 늘 늦을 수밖에 없었고, 어느새 쑥쑥 자라버린 아이들 역시 저마다 바빴다. 아내이자 엄마인 나는 늘 집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남편은 그다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필요에 따라 아내나 엄마를 수족처럼 부리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냥 그들은 사랑에 대한, 가족에 대한 선량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 p.134

그중 한 여자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냈다. 두 손으로 바람막이하면서 겨우 불을 붙인 여자는 명멸하는 불빛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쉼 없이 담배를 피웠다. 이 세상에 서 담배를 피우는 것 말고 중요한 일이 뭐가 있겠느냐는 듯 집요한 표정을 보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그동안 담배 한 대 못 피우고 살아온 내 인생이 가련할 지경이었다. 혹시, 죽으러 가고 싶지 않아요? 담배를 피우지 않은 여자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베란다에 떨어져 죽을까 봐 이곳에 앉아 있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유난히 불을 환하게 밝혀놓은 우리 집 베란다를 올려다보았다. 난간을 거머쥐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나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어느새 나는 다리 하나를 난간에 걸치고 있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홈웨어가 깃발처럼 나부낀다. 앗! 나는 소스라쳤다. 정말 누가 민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뛰어내린 것일까. 나는 홈웨어 자락을 꽃잎처럼 펼치면서 밤하늘에 떠있다.
--- p.140

옆자리의 그는 매우 고단해 보였다. 나이 든 남자의 잠든 모습은 어쩐지 쉽게 눈길을 거두지 못하게 하는 쓸쓸함이 배어있다. 안락의자에서조차 안락하지 못한 그에게 이제까지의 과오를, 이해득실을 재보는 일은 어쩐지 부당하게 느껴져, 나는 모든 질문을 보류시켜 놓았다. 나이를 먹는다고, 눈치가 백단이 된다고, 결혼 생활을 오래 영위했다고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안락의자에서조차 안락하게 잠들지 못하는 그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이십 분이나 삼십 분 안에 그는 다시 눈을 뜰 것이고, 왼쪽 눈은, 왼쪽이기 때문에, 조금 덜 열린 동공의 약간은 무심해 보이는 눈빛으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겠지. 홀쭉하게 여윈 뺨 옆으로 균형이 맞지 않은 양쪽 입매를 말아올리며 나를 향해 싱긋 웃음을 보낼지도 모른다.
--- p.159

그는 잠을 자고 있다. 뒤로 조금 젖혀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가가 젖어있다. 를 흔들어 깨웠다. 그가 조용히 눈을 떴다. 순간, 그가 잠자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꿈을 꾸었어?” 그가 눈물을 그득 담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뜻밖에도 그의 눈동자는 슬픔에 젖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곱 살 킨트의 눈길이나 노인의 무연한 눈동자와 확연히 다른, 무엇인가 가득 담고 있는 눈동자.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있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누구나 그러하지 않은가? 나도 그러하고 이강유도 그러하고 옆집 부부도 그러하고 경아 엄마도 그러하고. 그가 낯설어 보였다. 그의 눈길이 나를 투사해 벽 저쪽에 머물렀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어디 좀 데려다줄 테야?”
--- p.184

그렇게 누군가의 가슴에 나를 새기고 싶었다. 산을 올랐다. 험해진 산세 중턱에서 길을 벗어났다. 길이 아닌 곳이 더 매력적일 때가 있다.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없을 때까지 산속을 헤맸다. 마침내 하늘도 보이지 않고 나 자신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다다랐을 때 그제야 털퍼덕, 주저앉았다. 빈속에 소주 몇 병을 들이부었다. 부디 혼이 내 몸을 빠져나가기를, 그래서 자유롭게 누군가를 만나기를 바랐다. 살아서 몇 번이 아니라 죽어서라도 그녀의 평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를. 의외로 등덜미는 양털 침대에 누운 듯 포근했고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사위가 어두워지면서 누군가 물을 한 바가지 들이부은 것처럼 귓속이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노래를 불렀던가. 아이 후 해브 낫씽. 아이, 아이, 아이 후 해브 낫씽.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때까지.
--- p.201

“여보.”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호칭도 낯설었다. 약간 휘청거리던 그가 이내 몸의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처럼 정색하고 상대방의 눈을 서로 쳐다보기는 오랜만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인지도 몰랐다. 그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그의 깊고 고즈넉해 보이는 눈동자 속에 담긴, ‘무지와 생각 없음’으로 매도당했던 눈 속에 담긴 그의 상처와, 쉴 새 없이 펄럭이는 사념의 흔적을 보았다. 그의 눈이 그처럼 아름다웠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것은 조금 슬픈 일이기도 했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늘 고마웠어. 그리고, 미안했어.”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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