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백서에 포함된 열 개의 사례는 지난해 실제로 발생한 중대재해 사고입니다. 사고의 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지 고민해 보고,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고의 기술적 원인부터 이를 둘러싼 기업의 문화·관행적 원인까지 심층적으로 분석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 형식(storytelling)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열 개의 이야기는 일하는 모든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는 경영책임자의 안전에 대한 관심과 철학, 안전을 위한 인적·물적 투자, 원청 기업의 역할과 책임 등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 「발간사」 중에서
붕괴는 조용히, 하지만 순식간에 일어났다. 39층 콘크리트 타설을 위해 설치한 거푸집은 콘크리트 무게에 밀려 V자형으로 꺾여버렸고, 콘크리트는 낮은 쪽으로 일시에 쏠렸다. 한곳으로 쏠린 하중은 콘크리트 지지대를 통해 아래층(피트층) 바닥까지 전달되었고, 하부 지지대가 없던 피트층 바닥에서 붕괴가 시작되었다. 이어 지지대가 상실된 39층이 붕괴되며 그 콘크리트가 아래로 쏟아져 내리고 다시 그 아래층으로 이어지면서 순식간에 23층까지 도미노처럼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 안에는 대한민국 건설업의 고질적이고, 복합적인 문제가 얽혀 있다.
--- p.20
재해를 일으킨 식품혼합기는 공무팀 담당자조차 정확한 반입 연도를 모를 정도로 창고에 있던 오래된 기기를 수리하고 개조한 제품이었다. 만약, 제대로 된 위험성평가가 이뤄졌다면 식품혼합기 결함 요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설령 근로자가 관행대로 작업을 하더라도 위험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업에 대한 제대로 된 위험성평가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 p.56
앞서, 붕괴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채석장 토사의 기울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습기가 많아 흘러내리기 쉬운 슬러지 상태의 토사를, 수분을 흡수할 수 있는 마른 흙을 중간에 쌓는 등의 조치도 취하지 않고 거의 54도의 기울기로 쌓은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붕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김익환 소장은 상부 토사 증가 및 하중 부담 증가에 대해서 부인했으나 CCTV 증거를 산업안전보건감독관이 제시하자, “사실은 슬러지를 따로 야적하기가 어려워 계속 쌓게 되었다”고 인정했다.
--- p.91
2m 이상의 장소에서 작업할 때는 반드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안전난간을 해체하고 작업하는 경우 추락방호망을 설치해야 한다. 안전난간을 해체하고, 추락방호망도 설치할 수 없는 현장이었다면 사업주는 작업자에게 안전대를 지급하고, 반드시 착용하도록 했었어야 했다. 위3개 중 단 한 가지라도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사망사고로 이어지는 최악의 결과는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p.122
김 반장은 받은 도면을 보고 성실히 작업했지만 단 하루 만에 수정 지시가 내려졌다. 애당초 도면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수정 작업을 하는 일도, 그날의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현장 조사를 나갔던 산업안전보건감독관은 “누가 도면을 수기로 수정했는데, 누가 수정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어요. 그만큼 현장에서 도면 관리가 엉망이었던 거죠. 게다가 이 현장의 경우 도면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어요. 건축주와 도급업체인 E기업이 의도한 것, 시공사에서 도면을 이해하고 해석한 것, 작업자들에게 전달된 것들이 모두 상이했습니다.”
--- p.143
하지만 조사 결과는 조금 달랐다. F기업 사건을 담당한 부산지방고용노동청 박덕묵 산업안전보건감독관은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F기업은 친환경이라고 들었다고 했지만 세척제 제조사, 유통사 측에서는 친환경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는데, 제조사에서 제공한 MSDS를 보면 친환경물질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F기업은 세척제 성분을 확인하지 않았거나 화학물질 노출 관리를 소홀히 했던 것입니다.”
--- p.169
앞서 G기업과 T사가 근로자들에게 볼펜이나 이물질이 압축성형기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한 것은 이 기계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 중 날아오는 물체에 사람이 맞아 일어나는 사고, 즉 비래 사고의 가능성을 인지했다는 점을 말한다. 게다가 근로자들이 편의에 맞게 규격화되지 않은 수공구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알았다. T사의 대표는 맨손 대신 수공구를사용하여 작업할 수 있도록 나무 막대에 테이프를 감아서 근로자에게 주기도 했다. 근로자들이 임의로 수공구를 사용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 p.205
섬유벨트와 모따기의 상태가 어떠하든, 만약 이날 작업계획서를 작성했다면 어땠을까. 어떠한 작업 현장에도 위험은 있지만 특히 중량물 취급 작업을 할 때는 반드시 작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안전 수칙 기준 안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 중량물을 취급할 때는 추락 위험, 낙하 위험, 전도 위험, 협착 위험, 붕괴 위험을 예방할 수 있는 안전대책, 즉 적정한 크레인 및 줄걸이 용구를 선정하고 운반 경로와 근로자가 작업하기 전 안전점검 등을 포함해야 한다. 이 작업계획서 내용을 해당 근로자에게 전달하고 그 계획에 따라 작업을 하도록 지휘해야 한다.
--- p.231
미국 산업안전보건청(OSHA)에서 측정한 결과에 따르면 사람이 떨어질 때 1m의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자기 체중의 8배에 가까운 충격을 받게 된다고 한다. 안전보건공단에서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80kg의 근로자가 1.8m 높이에서 추락 시 약 1t의 무게가 가격하는 것과 같다고 밝혔다. 추락 시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라면 낮은 곳에서의 추락도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p.258
위험성을 인지해도 안전장비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근로자들은 임시방편을 택해 스스로를 지킬 수밖에 없다. 설사 안전모 같은 개인보호구가 지급되더라도, 안전모는 추락으로부터 근로자의 생명을 100% 보호해 주지 못한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신체를 추락으로부터 보호해 줄 안전장치가 없다면 비교적 낮은 지붕 위에서 하는 작업도 참담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추락 사고 사례 모두 이러한 안전장치를 단 하나도 마련하지 않았기에 발생했다. 사업주가 이 중 하나라도 설치했다면, 근로자가 허망하게 사망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지붕 공사 현장에 서는 추락을 방지하거나, 추락 시 신체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만이 지붕 위 재해를 막아줄 유일한 방법이다.
--- p.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