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는 근대철학이나 공맹유학孔孟儒學은 인간본성, 즉 인성人性이라는 추상적 보편성의 입장에서 인간을 동일한 것으로만 본 점에서 서양 인간과학과 공통된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문 바깥에서 우리는 보통 외향적인 사람과 내성적인 사람을 나누거나 다혈, 냉혈 등으로 구분해 인지하며 사람들을 다르게 대하며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경험적 생활인들’로서 추상적 차원에서는 인간 모두가 인성 면에서 동일할지라도 이보다 한 차원 낮은 구체적 차원에서는 인간들이 유형별로 구분된다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주체적 천성과 능력을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인간들의 이 타고난 유형적 차이는 인간본성을 구현하는 도덕론적 인성교육도 유형별로 달라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서양의 근대 사회·인문과학과 극동의 공맹철학은 인간본성(human nature)의 유형적 차이와 유형에 따른 도덕적 수신론修身論의 유형차이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인문·사회과학과 공맹의 인간론이 간과한 이 분야에 대한 학문적 탐구와 논의는 역설적이게도 고래로 사람의 생명을 취급하는 의학 분야에서 전개되어 왔다. 동서고금의 인간과학은 바로 이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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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천성과 체질의 체계적 분류와 이것의 의학적 적용에서 탁월한 과학적 성과를 보인 것은 역시 대한제국기에 탄생한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과 현대에 등장한 권도원의 8체질의학體質醫學이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이러한 탁월한 체질분류 측면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동양의 학문이 거의 다 서양의 과학 앞에 빛이 바래 죽은 마당에 중국과 한국의 전통의학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인류의 과학발전에 기여하는 분야라는 점에서도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등의 한의서韓醫書는 허준의 「동의보감」과 쌍벽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과학적 위치가位置價를 갖고 있다 할 것이다.
이제마는 인간의 체질을 태양·태음·소양·소음인 등 사상四象으로 나누고 이에 따라 체형, 인지적 판단능력, 실행능력(재능), 성정(정서적 심리상태) 및 타고난 도덕성의 차이를 이목구비耳目口鼻의 네 감지기관器官의 장단長短, 폐비간신肺脾肝腎의 네 장부臟腑의 대소大小, 함억제복?臆臍腹, 두견요둔頭肩腰臀 등 신체 부위와 지절肢節의 장단과의 상관성을 밝혀 이를 정연하게 체계화하고 사상인四象人 판별법과 각 사상인의 특징적 병증病症 및 약제처방을 일관되게 서술했다.
한편, 권도원은 독자적 탐구와 임상적 관찰을 통해 금양金陽, 금음金陰, 토양土陽, 토음土陰, 목양木陽, 목음木陰, 수양水陽, 수음水陰의 8개 범주로 분류하고 이 8유형의 사람들에게 해로운 음식과 이로운 음식을 임상적으로 분류하고 맥진법脈診法에 의한 체질판별법 및 병증과 침술처방을 정연하게 밝혔다. 이 두 한의학의 공통된 강점은 장부의 대소大小에 기초해 인지능력, 직관감각, 성정, 생리, 병증, 처방 등을 밝힌 정연한 이론체계에도 있지만, 상당부분 실천적 임상과 병증치료의 성과와 경험을 통해 검증되었다는 데 있다. 이제마는 사변적 동양철학, 특히 유학철학, 그리고 각종 동양 의서醫書의 독창적 재해석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직접 관찰과 환자치료의 실천적 임상경험을 통해 사상의학을 확립했다. 특히 8체질론은 창안자인 권도원이 오랜 개업의開業醫이기 때문에 임상검증의 정도가 더욱 높다는 점에서 신뢰할 만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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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인론은 체형, 감지능력, 직관적 분별력, 재능 등의 천성적 차이, 기질, 성격 등의 차이, 정서차이 등을 정연하게 논한다. 나아가 사상인四象人간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성차이, 이 차이에 따른 도덕적 수신修身의 방향 및 천명을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다. 이제마의 사상론이 타고난 본성적 체질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수신론까지 논하고 있는 것은 이제마의 사상론이 결코 체질숙명론이 아니라는 것을 함의한다. 이에 반해 동서양 고대와 현대의 기질유형론 및 권도원의 8체질론은 암암리에 체질숙명론을 담고 있다. 이제마의 사상론은 체질마다 체질적 본성상 뛰어나게 타고난 덕성과 모자라는 덕성을 적시하고 이 모자라는 덕성을 보완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체질적 천성은 바꿀 수 없지만, 마음을 맑고 곧게 닦아 덕성상의 체질적 결함을 보완하여 천인賤人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나아가 그 발현형태를 바꿔 긍정적인 에너지로 역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마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태극太極으로서의 마음’이 사상四象을 통제할 수 있는 주재자主宰者이기 때문이다.
이제마는 이 마음의 주재라는 관점에서 사상四象도덕론에서 암암리에 중도·중용개념을 적용하여 공자유학을 ‘사상유학四象儒學’으로 변화·발전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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