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이 음울한 과학(dismal science)이라면 수렵채집 경제에 관한 연구는 그중 가장 음울한 분야임이 틀림없다. 수렵채집민에 관한 책들은 구석기 시대의 삶이 고달팠다는 주장을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삶이 파멸에 임박해 있다는 관념을 전하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수렵채집민이 실제로 어떻게 삶을 꾸려나갔으며, 또 그들의 삶이 도대체 삶다운 삶이기나 했던가에 대해서는 의구심만 남겨두고 있다. 책의 지면을 통해 굶주림의 유령이 이들 사냥꾼을 은밀하게 뒤쫓고 있다. 그들은 기술적인 무능력으로 인해 일말의 휴식과 잉여도 제공받지 못한 채 단순한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노동해야 하고, 이 때문에 ‘문화를 창조하기 위한’ 최소한의 ‘여가’도 즐길 수가 없다.
--- p.49
현존하는 수렵채집민은 대체로 원래의 생활근거지로부터 추방당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생산양식에 적합하지 않은 열악한 환경에 내몰려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구석기인들이다. 그들은 문화발전의 주요 중심권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문화진화를 향한 전 지구적 차원의 행진으로부터 약간의 유예를 허락받은 채 이 시대의 은신처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좀 더 선진적인 경제체계의 이해관계와 반응범위에서 멀리 벗어나 너무나 빈곤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p.59
물건에 적용되는 것과 동일한 폐기처분(debarassment) 방침이 인간에게도 적용되는데, 이는 앞서 논의한 것과 유사한 용어로 기술할 수 있고 또 유사한 원인에 귀속시킬 수도 있다. 이들 다소 냉혈한적으로 들리는 용어에는 휴대성의 한계점에서 발생하는 수익 감소, 최소한의 필수도구, 복제의 배제 등이 있는데, 이는 바로 영아살해, 노인살해, 수유기 성적 금욕 등 대다수 수렵채집민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는 관행의 다른 이름이다. 아마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장치를 고안해 냈을 것이라는 추정은 ‘부양’을 ‘먹여 살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데리고 다닌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사실일 것이다.
--- p.92~93
원시 사회의 ‘경제’를 논하는 것 자체가 이미 비현실적이다. 원시 사회에는 구조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경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전문화된 조직이라기보다 일반적인 사회집단과 사회관계, 특히 친족집단과 친족관계가 수행하는 어떤 것이다. 통상 ‘비경제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온 집단이 경제적 과정의 뼈대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경제는 구조라기보다 사회의 한 기능이다. 특히 생산은 가내집단에 의해 제도화되고, 가내집단은 통상 이러저러한 종류의 가족으로 구성된다. 부족 경제의 가구는 중세 경제의 장원이나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법인회사에 해당된다. 이들 각각은 각 시대의 지배적인 생산제도이다.
--- p.139~140
루이스 헨리 모건은 가내경제의 프로그램을 ‘살아 있는 공산주의’라 불렀다. 이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가구생활이 경제적 사교성의 가장 차원 높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가구생활은 “능력만큼 일하는 개인에서부터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개인까지”, 즉 능력에 따른 노동분업을 통해 각각의 과업을 부여받는 성인들에서부터 자신의 기여와는 상관없이 필요한 것을 제공받는 노인은 물론이고 어린이와 무능력자들까지 아우른다. 사회학적으로 표현하면 가구는 외부인과 분리된 이해관계와 운명을 가지고 내부인의 정서와 자원에 대해 일차적인 청구권을 가지는 집단이다.
--- p.162
결국 호혜성과 추장의 관대성이라는 이상은 사람들의 종속을 신비화하는 데 기여한다. 관대성은 추장이 공동체로부터 받았던 것을 단지 공동체에 되돌려 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것을 호혜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추장은 자신이 받은 전부를 돌려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순환은 한 꼬마가 아버지가 준 돈으로 산 선물을 아버지에게 주는 크리스마스의 호혜성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족적 교환은 사회적으로 여전히 유용하고 추장의 재분배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재분배되는 재화의 다양성과 시기를 고려해서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구체적인 이익에 대해 고마워한다.
--- p.212~213
부족사회의 빅맨은 오랜 기간 동안 대량으로 보관하기에 쉽지 않다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 음식, 돼지, 혹은 그와 유사한 종류의 재화로 구성되는 권력기금을 운용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정치적 기금을 축적하기 위한 추출장치는 발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꼭대기로부터의 분배를 위한 재화의 비축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기술적으로도 어려운 것이다. 이 딜레마는 바로 화폐의 운용을 통해 해결 가능하다. 즉, 부를 상징으로 전환함으로써, 그리고 대부와 교환에 화폐를 계산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가능하다. 그 결과 재화를 대규모로 요구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그렇게 축적된 엄청난 규모의 권력기금이 분배되어 지위로 전환될 수 있을 때가 오는 것이다.
--- p.332
선물은 거부해서도 안 되고 보답하지 않아도 안 된다. 대부분의 선물주기는 주로 사회적 효과를 발휘하는 도구적인 것이다. 한 부시맨 남성의 주장에 따르면, 심지어 물건에 대한 요구도 사람들 사이에 ‘좋아하는 감정을 형성한다’. 이것은 ‘그가 여전히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내게 뭔가를 요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셜은 “내 생각에 선물주기는 적어도 사람들 사이에 무엇인가를 형성한다”라고 간략하게 덧붙인다. ‘선물주기’는 호혜성의 형식과 사회적 섹터라는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교역’과 구별된다.
--- p.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