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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1. 왕의 비서실, 승정원은 어떤 관청일까? 승정원의 조직과 역할 승정원을 구성하는 사람들 2. 역사 속의 승정원 사람들 태종의 비서실장, 황희의 명암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전달한 승지, 성삼문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이세좌 정조의 비서실장, 홍국영 3. 『승정원일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승정원일기』의 편찬과 활용 승정원의 개편과 일기 제목의 변화 현존하는 당후일기 4. 『승정원일기』에는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까? 실록보다 훨씬 풍부한 내용을 담다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마지막 말씀 생생하게 전해지는 삼전도 굴욕의 현장 숙종과 천연두의 악연 1759년 영조의 혼례식 현장 1760년 청계천 준천 공사의 기록 영조 탄신 행사의 근거가 된 『승정원일기』의 기록 영조와 정조의 새해맞이 고종, 춘당대에서 과거시험을 실시하다 나오는 말 주석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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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의 직제는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도승지를 비롯하여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등 정3품 직책의 육승지와 정7품 직책의 주서 2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육조의 업무를 분장하기도 하였다.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의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는데, 오늘날 비서실장과 함께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정기획수석, 정무수석, 시민사회수석, 홍보수석, 경제수석, 사회수석 등이 각각 배치된 것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p.24 그러나 권력의 힘은 허망하다. 홍국영이 도승지에서 파직되자 그동안 그에 대한 원한이 있던 인물들의 상소가 빗발치듯 이어졌다. 정조도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유배를 명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정조는 그를 도성에서 가까운 현재의 제기동에 놓아두며 몇 번의 왕래를 하였으나, 정조가 초본을 작성했다는 김종수의 유배 상소를 시작으로 계속되는 반대파의 상소를 받으며 도성에 출입할 수 없게 하고 강원도 강릉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했다. 정조의 신임을 완전히 잃었다는 좌절감 때문이었을까? 홍국영은 유배지 강릉에서 3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p.60 앞에서 현존하는 당후일기들을 살펴보았지만, 당후일기가 사초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경우는 극히 한정되며, 대부분은 개인의 문집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는 당후일기 담당자가 주서로 있으면서 작성한 초본을 세초하지 않았거나, 세초를 한 경우에도 그대로 그 문건을 남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례에서 『승정원일기』의 원본이 되는 당후일기의 세초는 실록의 세초와는 달리 엄격히 지켜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또한, 주서로 재임한 기간 전체의 일기보다는 일정한 시기에 작성한 일부의 일기가 현재까지 전해짐을 볼 수가 있다. --- p.91~92 1759년 6월 초여름, 66세의 신랑 영조는 15세 신부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조선 왕실의 최대 경사인 결혼식의 모습은 『승정원일기』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먼저 영조가 66세라는 고령인 점을 고려하여, 계비가 될 후보들의 금혼 연령을 규정한 내용이 흥미를 끈다. 1759년 5월 4일, 예조판서 홍상한이 계비 간택을 위한 금혼령을 속히 내릴 것을 건의하면서, 금혼 연령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영조의 뜻을 물었다. 이에 영조가 18세에서 20세를 금혼 범위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피력한 내용이 『승정원일기』에 보인다. --- p.124~125 위에서 여러 사례를 살펴본 것처럼 『승정원일기』는 매우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그것도 매우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특히 실록의 기록과 비교할 때, 같은 사안에 대해 왕과 신하의 대화체로 서술하여 마치 현장에 직접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승정원일기』의 자료적 가치를 보다 돋보이게 하는 요소는 앞부분에 날씨와 매일의 담당자를 기록한 점이다. 특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날씨 관련 자료는 288년간의 날씨 기록이 빠짐없이 정리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 p.156 |
※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에게 ‘조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보통 양반이나 선비의 모습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양반과 선비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양반들의 삶뿐만 아니라, 상인과 농민들의 삶도 함께 바라봐야만 한다. 그런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처럼 국가 기록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히도 개인의 일기나 서간집 등 다양한 사적 기록이 발굴됨에 따라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일기나 서간집을 남긴 사람들이 주로 식자층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한계는 있지만, 상인이 남긴 일기도 있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이 남긴 마을의 이야기도 있어 그동안 알기 어려웠던 주변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통생활사총서는 이처럼 조선의 변두리를 살아간 사람들의 일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들을 따라서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가 몰랐던 조선 사람들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공적인 지도자 하면 우리는 보통 한 개인의 뛰어난 역량과 자질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정말로 혼자서 모든 것을 이루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대개 그들의 성공은 그들 곁에 그에 못지않은 측근들이 힘을 보태 주었기에 가능했다. 이 책은 그렇게 왕의 그림자 뒤에서 왕을 보좌했던 승정원 사람들과 그들의 기록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론 왕의 측근인 만큼 그들이 완전히 변두리를 살아간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대통령비서실의 면면들이 그렇듯 모두 이른바 조선의 엘리트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중심과 변두리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태양계의 중심인 태양이 거대한 우주에서는 변두리에 지나지 않듯이,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승정원은 결국 왕을 둘러싼 변두리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그리고 이처럼 왕이라는 중심을 둘러싼 승정원 사람들의 이야기는 왕의 그림자에 가려져 조명되지 않기가 일쑤였다. 우리가 정승으로서의 황희에 대해서는 알아도 승지로서의 황희에 대해서는 몰라 왔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 이 책과 함께 중심 속의 변두리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해 계속 변두리를 향해서 나아가다가 보면 언젠가 우리는 조선 사람들의 전체상을 대략적이나마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