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내가 해온 요리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였다. 불안하지 않기 위해 요리했다. 세상으로 향해 있던 모든 감각을 다 닫고 눈앞의 요리책에 코를 박았다. 그런 내게 사찰요리는, 요리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내가 속한 세상을 넓혀가는 훌륭한 방법이라는 것을 가만히 일러주었다. 사찰요리 덕분에 눈앞의 하루를, 다가오고 사라지는 계절을, 내 곁의 사람들을, 내게 주어진 삶을 좀 더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면 과장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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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찰요리를 배우기 시작할 때는 메뉴 이름을 봐도 도무지 뭔지 모르니 선뜻 수업을 신청하기 애매했다. 육근탕? 타락죽? 제피장떡? 지금은 저 이름만 봐도 입가에 침이 뚝뚝 흐르지만, 그때는 위험부담을 안기 싫어 맛을 가늠할 수 있는 요리 수업만 골라 들었다. 유부주머니탕, 고추잡채 같은 것들. 그런데 분명 그동안 숱하게 먹어본 음식인데도 지금껏 알던 맛과는 급이 달랐다.
--- p.38
그렇지만 해보니 알겠더라. 세상 모든 일이 반드시 끓어 넘쳐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걸. 보기에 차가울 정도로 고요하고 묵묵한 기다림이어야 비로소 이룰 수 있는 일도 있다는 걸. 몸뿐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 오신채도 있다는 걸. 그동안 나는 마음으로 오신채를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잘해야 해, 빨리 성공해야 해, 인정받아야 해……. 내가 끌어안고 있는 온갖 욕심에 들끓는 마음이 괴로워 날뛰는 걸 ‘열정’이라 애써 믿고 싶었다. 아닌 줄 알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나라는 사람의 실상을 인정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 p.53~54
봄이면 두릅을, 여름이면 깻잎과 고추와 감자를, 가을이면 연근과 우엉을 튀겼다. 모든 수업마다 기름 솥 앞에는 튀김용 젓가락을 든 내가 있었다. 젓가락을 솥 바닥에 수직으로 꽂아 기포가 젓가락 주위에 도로록 달라붙으면, 그때가 바로 튀김 재료를 기름에 넣을 운명적 순간이다. 어느 날 물이 통통하게 오른 두릅을 튀겨서 딱 건져냈는데, 평소에 여간해선 말이 없던 스님 한 분이 “튀김 잘했네”라는 다섯 자 평을 남기고 홀연히 지나가셨다. 다섯 자 평이 내겐 별 다섯 개 같았다. 끓는 기름에 물을 끼얹던 내가 마침내 튀김 마스터로 거듭난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 p.75~76
엄마가 달걀 옷이 꽉 차도록 커다랗게 케첩 글씨를 써주는 순간이 좋았다. 식탁에 앉아서 케첩 통을 든 엄마의 손끝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글씨를 쓰는 엄마도, 지켜보는 우리도 모두 쉿. 마법이 완성되는 순간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걸 우린 모두 배우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글씨가 완성되면 그때야 우리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샛노란 달걀 옷을 크게 한 숟갈 떴다. 엄마가 오직 나를 위해 준비한 음식, 내 이름이 새겨져 있는 음식. 한 숟갈 한 숟갈 내 이름을 떠먹으면 몸 안에 퍼지던 따뜻한 기운. 내 인생 최초의 고명, 나를 위한 누군가의 맨 처음 마음.
--- p.91~92
육근탕은 어느 때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짓는 음식, 목숨을 걸고 수행하는 이들에겐 생명 그 자체인 음식이다. 땅의 에너지를 가득 안은 뿌리란 뿌리는 다 넣고, 정성이란 정성도 죄다 넣어서 그렇게 오랜 시간 고아내는 음식이다. 한 그릇 훌훌 마시고, 세상에 너의 뿌리를 내리라고, 마침내 흔들림 없는 뿌리가 되라고. 소리 없는 응원을 담뿍 담아서.
--- p.108~109
뭐, 보이차 밥뿐인가. 어디서 보지도 듣지도 못한 메뉴들이 수업마다 속속 등장했다. 봄향기만두, 오미자딸기국수, 묵은지잡채……. 이름만 들어도 기발한 아이디어가 그대로 느껴지는 메뉴들. 이렇게 근사한 아이디어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내 마음을 들켰는지 하루는 스님이 웃으며 이런 말을 하셨다. “스님들이 별걸 다 먹는다 싶죠? 사실 별게 아니에요.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고 나면 재료가 남는데, 안 버리려고 궁리를 하다 보니 이런 메뉴도 만들어졌네요.”
--- p.150
사찰요리를 배우는 시간이 쌓일수록 몸이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홍고추와 청고추를 따로 썰어 넣었을 때와 함께 썰어 넣었을 때의 은근한 색 차이가 눈에 보였고, 따로 볶은 야채와 한꺼번에 볶은 야채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손으로 떠낸 호박과 감자를 넣은 된장찌개는 훨씬 시원하고 구수했다. 분명 똑같은 레시피로 만들었는데도, 스님이 만든 것이 훨씬 맛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귀찮아서 무시한 작은 과정들이 요리의 결정적인 부분을 좌우했다.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따로 썰고, 따로 볶고, 칼 대신 숟가락을 사용하는 데는 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거였다. 스님 말마따나 요리하는 사람이 바보라서 쉬운 일을 굳이 어렵게 하는 게 아니었다.
--- p.160~161
온갖 푸른 것들이 돋아나는 봄과 여름. 풀과 나뭇잎을 먹는 사람이, 푸른 것들을 실컷 먹다가 푸른 것들이 깡그리 사라지는 겨울이 오면, 그때 꺼내 먹으려고 나물을 말려두었을 것이다. 처음에 묵나물은 그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다시 푸른 것들이 실컷 돋아날 계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푸른 것들의 시간을 그리워하면서, 오래된 풀을 꺼내 삶는다. 솥 곁에 쭈그리고 앉아 풀 삶는 향기를 맡으면서, 봄의 온기를 느끼면서. 그렇다면 묵나물은 너무나 낭만적이다.
--- p.187
매주 수업시간마다 먹을 생각에 들떴다.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을 끔찍하게 싫어했는데, 겨울이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시래기찜과 육근탕만 있다면 추운 계절을 든든히 날 수 있으니, 더는 겨울이 무섭지 않았다. 겨울이 끝날 즈음 정효 스님이 수업을 마치며 “좋은 날 다시 만나요” 하고 손을 흔들었을 땐 서운함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알고 있었다. 곧 봄과 함께 주호 스님이 돌아온다는 걸. 곰취며 두릅이며 푸릇푸릇한 이파리를 들고선 “이거 보세요” 하고 멋진 계절을 또 한 아름 안겨주실 거라는 걸.
--- p.202
죽은 참 정직하다. 시간과 노력의 집약체다.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을 태연히 삼키지 않는다. 약한 불에서 오래 젓다 보면 마침내 투명해진다. 투명하다는 것,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단 한 톨의 의심 없이 믿을 만하다는 사실은 몹시 부러운 것이다. 죽을 저을 때마다 생각했다. 나도 때가 되면 투명해졌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 나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고.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누가 좀 일러줬으면 좋겠다고.
--- p.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