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사님, 늘 사용하시는 그 전도 접촉점을 글로 좀 옮겨 보세요. 나도 그걸 보며 따라 해 보고 싶어요.”
“글로 쓸 게 뭐 있어요? 그때그때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대로 하면 돼요.”
그 말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뭔가 허탈했다. ‘전도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라야 전도를 하는가?’라는 의구심까지 들었다.
“그래도 전도할 때마다 주셨던 생각들을 잘 기록해 보세요. 그것을 자료로 만들어 나누면, 전도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나의 주문에, 전도사님은 시간 이 나면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분은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후로도 나는 전도의 접촉점을 마련해 줄 그 누군가를 계속 찾고 기다렸다.
어느 날 말씀 묵상을 하는데 ‘네가 찾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너다’라는 마음을 주셨다. “저는 할 줄 모르는데요? 저는 전도하고 싶은 마음만 있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주신 성경말씀이 열왕기하 4장이었다.
엘리사의 제자의 아내가 죽은 남편으로 인해 빚을 져서 그 문제를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왔다.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느냐? 집 안에 무엇이 있느냐?”
“제가 가진 것은 기름 한 병밖에 없습니다.”
“가서 네 이웃에게 다니며 그릇들을 빌려라.”
이 여인은 그릇들을 빌려와서 한 병의 기름으로 그릇마다 부었더니 계속 기름이 나왔다.
나는 이 말씀이 “네가 가진 접촉점에 대한 간절함의 기름이 한 병 있는데, 이웃에게 그릇들을 빌려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렸다.
… 불현듯 여기저기서 읽었던 글들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나는 메모하기 시작했다. 설교 말씀, 독서, 신문, 미디어 등에서 접촉점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생활 속에 적용해 보았다. 특히 병상에서 외롭게 누워 있는 환자들에게 그들의 상황과 눈높이에 맞춰 응대해 보았다. 그들은 금세 마음을 열었다.
--- pp. 23~25
복음은 선포되어야 한다. 숨겨 두는 것은 비밀이지 소식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자기들의 틀을 만들어 전하는 이단들이 있다. 그들이 성장하는 이유가 꾸준한 전도 시도 때문이라면, 참된 복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전도하지 않음으로써 복음이 퇴색되는 것은 전적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다.
세상에는 이미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만연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구제와 봉사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한다. 전혀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내 삶을 통해서 저절로 전도가 된다면 더 바랄 것 없는 기쁨이겠지만, 내 삶으로는 누군가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전도지 등을 사용하여 의지적으로라도 전도할 필요가 있다. 환경과 직업 등을 백분 활용해서 전도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그렇다면 복음은 누구에게 먼저 전해야 할까? 대개는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다가 실족한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복음은 나 자신에게 가장 먼저 전해야 한다.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회심한 뒤에도 여전히 죄인이기에, 복음은 그리스도인이 하루도 빠짐없이 복용해야 할 약이다.”
나부터 복음에 붙잡혀야 남을 전도할 수 있다.
--- pp. 39~40
우리는 외출할 때, 때(Time)와 장소(Place)와 상황(Occasion), 즉 TPO에 어울리게 옷을 입고 나간다. 야구장이나 축구장에 갈 때는 모자와 티셔츠 등 간편한 옷차림을 한다. 그런가 하면 결혼식장에 갈 때에는 정장을 입고, 장례식장에 갈 때는 검정 옷이나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가는 것이 예의다. 마찬 가지로 전도도 TPO에 맞는 전도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래야 대화가 통하고 마음이 열린다.
뇌졸중, 치매 등으로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께는 “백만 원짜리 수표가 조금 구겨졌다고 만 원이 되지 않듯이, 늙고 병들었다고 해서 어르신의 존재 가치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면 서 세상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다름을 전한다. “너희가 늙어도 여전히 품에 안고 너희가 백발이 되어도 여전히 너희 편을 들어 주겠다”(사 46:4 참조)고 선포하면, 어르신들이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상대방의 형편과 상황을 파악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는 전도 접촉점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전도! 이제는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전도가 안 된다, 전도는 어렵다고 말하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반드시 기다리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준비해야 한다. 한국 교회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걱정만 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도 접촉점을 찾아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면 한국 교회도 밝은 희망이 보일 것이다.
--- pp. 54~55
04
죽음을 앞둔 중증환자
(죽음보다 더 큰 사랑)
이렇게 어렵게 투병하시는 선생님을 뵈니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꼭 전해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요. 그것은 병이나 죽음이 선생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생님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살았는데,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몹쓸 병에 걸렸나 하는 생각이 드시지요? 선생님의 죄가 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더 넓고도 크지요.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선생님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 지금 하나님께선 선생님의 마음 문을 노크하고 계십니다.
---「활용북」 본문 중에서
06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는 분
(빛은 어둠을 몰아내는 특효약)
곰팡이가 생긴 곳은 아무리 닦아도 곰팡이가 다시 생기지만, 빛이 비치면 곰팡이는 사라집니다. 온갖 갈등, 절망, 우울의 곰팡이가 생겼을 때 공부를 하거나 도를 닦거나 명상을 한다고 해서 내 안에 있는 어둠이 사라지진 않습니다. 내 힘으로는 없앨 수 없지요.
성경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 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희망이 싹트고 생기가 돌고 기쁨이 솟아납니다. 곰팡이 같은 우울과 무기력이 떠납니다. 어떤 절망과 좌절이 있어도 희망과 꿈이 있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활용북」 본문 중에서
22
죽으면 끝이다,
아무것도 없다
(저 너머에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소멸되므로,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지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혹시 제사를 지내십니까?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영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죽은 조상이 오셔서 드시라고 음식을 차리고 절하지 않습니까? 또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 ‘별세하셨다’, ‘타계하셨다’라고 말하지요. 이것은 ‘왔던 곳으로 다시 갔다’, ‘이 세상과 이별한 뒤 다른 세상, 다른 세계로 떠나갔다’는 뜻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입니다. 이런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이런 세계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분명 죽음은 끝이 아니고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며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지 말씀드려도 될까요?
---「활용북」 본문 중에서
23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착하고 바르게 살면 된다
(갈 곳 없는 우등생과 부요한 낙제생)
정말 선생님의 얼굴만 봐도 선하고 정직하게 사신 분 같군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바르게 살면서 좋은 일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선생님,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해가 지면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요. 그 아이는 착하고 공부 잘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의 자식이기에 자기 집에 당당히 들어갑니다. 내 자식이 아무리 망나니 같은 행동을 해도 아무 때나 우리 집에 들어올 수 있을 뿐 아니라, 유산도 그 아이가 받습니다. 옆집에 공부 잘하고 착한 모범생이 있어도, 그 아이는 함부로 우리 집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처럼 천국도 하나님의 자녀라야만 들어갑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로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지, 간략하게 말씀드려도 될 까요?
---「활용북」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