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여 꽃진 개복숭아 나무 사이로 옮겨가지 않을까 생각하는 찰나
한낱 구경꾼의 예측을 한껏 비웃기라도 하듯 참새 몇 마리
뜻밖에 철근 자르는 전기톱 소리 요란한 신축공사장 쪽으로 푸르릉 날아가 버린다
이제 사전 동의를 구해야만 서로 입맞춤할 수 있다는 입법立法의 시대
이유 없이 끌리듯 내려앉고 또 날아갈 뿐인 늘 부산하고 부지런한 시간의 가지가
바로 제 먹이를 채집하는 임시 거처이자 돌연 휴식을 취하는 묘지라는 듯
겸재정선미술관 뒷동산 소나무 가지에서 잠시 짹짹거리던 참새들이 그러나,
제 마음의 명령에 따라 날아가고 날아오길 반복할 뿐인 자유의 참새들이
---「참새 생각」중에서
그저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 수수께끼 같은 시간이 가만 그늘처럼 피워낸 흰 박꽃 위에 살짝 내려앉아 있다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한 자생의 고독이 슬그머니 동네 입구의 녹슨 드럼통을 사사로이 비추는 시월
거추장스런 가식과 격식을 벗어던진 개구리밥, 과꽃, 다알리아가 오히려 생기 있게 생전의 화단을 꾸려가고 있다
3층 주택단지 난간마다 색색의 잘 마른빨래들이 결승문자結繩文字처럼 펄럭이고 있는 호탄리의 오후
투명한 고요를 덥석 문 죽음의 먹이사슬이 배고픈 현재의 뱃속으로 끝없이 파고들다가 또다시 무인칭의 미래를 내뱉고 있다
---「박꽃 피는 시간 ― 영동시편 2」중에서
누군가 겨우 채집으로 목숨을 연명하던 그 먼 곳. 그러나 이미 원시의 석회질 속에 퇴적한 채 머물러 있는, 그러기에 너무나도 가깝고도 가까운 패총貝塚의 연안. 테트라포드*를 가벼이 날려버리는 폭풍의 파도를 통해 머나먼 시간의 지평으로, 문자가 없던 시대로 쫓겨나갈 때, 여전히 안개주의보가 유효한 바다 위에서 함부로 출항을 꿈꾸거나 저마다의 운명을 한낱 청미래덩굴처럼 가늠한다는 건 실로 어리석은 일. 그리하여 마침내 돼지 창자 속 같은 어둠을 뚫고 누군가 제 고향의 포구로 들어설 때, 그 언제라도 돌담길에 들어서면 늙으신 어머니가 왈칵 달려 나올 것 같은 뜻밖의 그리움을 만나는 건 각자의 몫. 아주 먼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만 활짝 피어나는 세계만방의 꽃들, 더욱 먼 바다로 떠돌 때만 더욱 가까이 출렁거리는 잔물결의 손죽도엔 정작 아무도 주워갈 이 없어 땅바닥에 뒹구는 노란 살구향이 여름 공기를 그윽하게 적시고 있다.
* 테트라포드tetrapod는 방파제나 강바닥을 보호하는 데 쓰이는, 원기둥 모양의 네 개의 발이 나와 있는 대형 콘크리트 블록을 말한다.
---「손죽도」중에서
봄바람에 펄럭이는 광목천의 광고판, 깜박이는 거리의 신호등이 중얼거린다. 자전거 도로에 잠시 정차한 치킨 배달용 오토바이가, 건너편 우체국 옆 벚꽃이 재잘거린다.
서로가 알아들을 수 없기에 한껏 자유로운 말들이 마치 무심한 행인들처럼 오가는 고촌사거리.
미처 귀 기울여 듣지 못했을 뿐, 잠시의 침묵도 못 견디는 신축공사장 타워 크레인이, GS25편의점 입간판이 쉴 새 없이 속삭이고 있다.
누군가 무심히 그 풍경 속으로 가뭇없이 다가오거나 사라지는 동안, 신규분양 중인 오피스텔 건물 앞의 만국기처럼 펄럭이던 불통의 언어들이 혼잣말로 제각기 떠들썩한 오후.
하나의 목표 또는 목적지를 강요할 수 없는, 그 어떤 공통분모도 갖지 않는 저마다의 말들이 붉은 잇몸의 흰 이빨을 드러낸 채.
---「고촌사거리」중에서
문득 서퍼surfer처럼 거친 사랑의 해일 안쪽을 자유로이 오르내리던 백석이
윤이상이, 박경리가 미처 다 부르지 않는 귀향의 노래를 나직이 합창하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곧바로 난바다로 통통거리며 출항하는 한 척의 고깃배처럼
아니면, 뜻밖의 난기류를 잘도 헤치며 솟아오르는 한 개의 긴고리눈쟁이연鳶*처럼
통영 바다는 그때서야 은빛 파도의 맥동脈動으로 출렁이며 모든 이들의 고향
오후 두 시 굴 양식장 부표 위에 갈매기 한 마리 위태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전통의 통영 연鳶 가운데 하나로 ‘큰바람이 일면 배와 배를 길게 묶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통영바다」중에서
마치 당연하다는 듯 오래 외부인의 무단출입을 막아선 길고 높은 담장에 스스로가 갇힌 꼴인 절대군주의 윤건릉
뭐라고 불러도 좋을 생기의 귀룽나무가 불멸의 꿈 너머 푸르디푸른 순정의 흰 꽃을 한껏 피워 올리고 있었습니다
봄 햇살 파고드는 4월 초순의 숲 사이 연한 풀을 뜯다가 생각난 듯 가끔씩 고개 쳐드는 고라니들이 마치 신성가족처럼 다가오던 어느 날
그때서야 우린 더 이상 운명이라고밖에 달리 설명 안 되는 불가사의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몸을 실을 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직진을 멈춘 연둣빛 우주의 한순간에 가만 질서를 부여하고자 위태로운 평형의 돌탑을 말없이 쌓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귀룽나무」중에서
낡은 소파에 1월의 겨울 햇살이 안단테로 게으름 피우고 있는 사이
귀먹은 베토벤이 제 악보를 듣기 위해 마룻바닥에 귀를 대듯
난 아직 오고 있는 것들, 아니면 벌써 떠나가는 네 곁에 머문 채
여태껏 들킨 적 없는 내 흰 데드마스크를 잠시 벗어 내려놓네
이제 꿈속에서 귀신을 봐도 놀라지 않는 시간의 마룻바닥으로 건너오는 동안
바닥난 그리움의 귀청으로 자주 끊길 듯 간절하게 이어지는 네 발자국 소리들,
하지만 어느 계열로 무리 짓거나 어느 시대로 분류될 수 없는 선율이
오, 이내 텅 빈 실내의 나무 기둥으로 솟구치다가 깃털처럼 가만 내려앉는데
어느새 귀 멀고 눈멀어 더 이상 아무것도 보거나 듣지 못한 채
여전히 내 둔중한 발바닥으로 소용돌이치는 쓰디쓴 침묵의 기척들
비로소 제 스스로를 위해 연주하며 가만 한 발씩 내딛는 너를 느끼네
* 1982년 5월 개장, 현재까지 남아있는 광주 유일의 고전 음악 감상실.
---「침묵 ― 광주베토벤 고전 음악감상실*」중에서
아무도 없으리란 걸 알고도, 바보처럼
뙤약볕 먼지 푸석한 긴 가뭄의 강둑길 걷네
행여 아직 거스르기 힘든 물살에 휩쓸려 들까
갓 부화한 다슬기, 송사리 치어들이 떼 지어
몰려있던 황구지천 개울가로 걸어 들어 가네
눈먼 사랑은
여전히 각자의 운명을 떠맡은 채 말없이
흔들리던 아카시아, 버드나무 가로수를 지나
한사코 바다로, 바다로만 흘러가 버린
강물처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 여름,
오로지 보랏빛 토끼풀 반지를 낀 소녀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그 강변에 서 있네
아, 그러나 늘 짧고 아쉽기만 한
여름의 감각이란
쉴 새 없이 반짝이는 은빛 강물이거나
그사이 찾아든 갑작스런 어둠 같은 걸까
이내 길 잃은 눈길은
가마우지 서넛 젖은 날개 털며 쉬던,
그 강변의 한 가운데 마구 소용돌이치는 물목
그만 놓친 손길 길게 뻗어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흐린 강바닥을 어부처럼 더듬네
---「여름의 내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