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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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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1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146쪽 | 210g | 128*205*20mm
ISBN13 9791193093276
ISBN10 1193093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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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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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주의보 속에 이정표가 서 있고
길 끝에 그가 있다는 표식이다
병은 눈두덩을 부벼댔으나
발끝은 돌부리를 지나치지 못했다
어떠한 사실을 잊을까 봐
손바닥에 글씨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병이 놀고 있다
짚단을 쌓아논 볏누리를 헤집고
그가 고함을 질렀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놀지 말랬지!
사금파리가 풀잎과 함께 흩어졌다
어떤 조각은 얼굴을 때렸다
그 밤 병의 손바닥에는
여러 글씨가 적혔다가 지워졌다
안개비가 어느새 는개 되었다
그는 어떤 단어일까
병은 비척이며 일어섰다
길바닥에 흩어져 있는 뜻씨들을
바지 주머니에 모두 담았다
무겁고 차가웠다
어느새 눈꺼풀에 는개가 맺혀
눈을 깜박일 때마다 흘러내렸다
가볍고 따뜻한 뜻씨들을 채워 보았지만
저쯤에서 두고 온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볏누리 속에 갇혀 있었다
빗낱은 조금씩 굵어져
는개가 가랑비 되었다
병은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길바닥 한가운데서 자꾸 미끄러졌다
빗밑이 가벼울 거라는 예보처럼
처음부터 모두 오보였다
---「이정표가 있었고」중에서

손톱 밑에 얼음이 긁혀야
비로소 겨울이었다
소작농이었던 그는
그제야 성주가 되었다
밤중에도 돌아올 줄 모르는 그를
몇 번이고 찾으러 갔다
아버지! 부르자 삐그덕 소리와 함께
담배 연기가 마중 나왔다
장졸을 부리고 있었다
휙휙 바람을 가르던 손 안의 부하들
못 당하겠어! 패한 이웃들이
씁쓸히 장기알을 쓸어 담았다
처음으로 그가 자랑스러웠다
다시 성주가 되기 전의 어떤 계절
그는 길을 떠났다
어디에도 발자국은 없었다
가는 것도 일등이네!
누군가 술잔을 홀짝이며 중얼거렸고
전승을 올리던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올해 겨울에도 성을 쌓았다
장기판 같은 논둑 밭둑마다 밤새
장졸들이 날아다닌 흔적 새하얗다
햇빛을 받아 온 세상이
그의 호탕한 웃음, 승전보 같다
---「장졸들은 날아다니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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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들은 서정을 통해 서사를 만들고, 또한 서사를 통해 서정을 강화한다. 그래서 그의 시들을 읽으면 ‘서정적 서사’ 또는 ‘서사적 서정’이라는 문학 이론서에 없는 새로운 조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여러 인물들의 시점으로 서술하여 그들의 경험과 정서가 중층적인 서정을 형성하고 그것이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다시 말해 다양한 인물들의 서정이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배세복 시인만의 특별한 시적 형식이다. 이 점이 이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이며 고유성이다.
- 황정산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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