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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독백

리뷰 총점9.7 리뷰 18건 | 판매지수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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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2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115*190*20mm
ISBN13 9791198102416
ISBN10 1198102411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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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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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드니 쇼트커트를 한 여자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사고 싶다고 연락해온 사막여우였다. 지금껏 작가 얼굴을 보겠다고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단편 시나리오는 주로 학생들이 과제로 제출하려고 샀기 때문에 구매자들은 얼굴은커녕 실명을 밝히기도 꺼렸다. 사막여우는 달랐다. 작년에 사들인 시나리오로 찍은 영화가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나리오 팔 거죠?”
---「달의 마중」중에서

짜파게티를 끓이고 있는데 엄마가 비명을 지르듯이 나를 불렀다. 베란다에 널어놓았던 솜이불이 물을 먹고 축 처져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화창했다. 물은 위층에서 조용히 떨어지고 있었다.
“한빈아, 빨리 올라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 와.”
위층 남자는 윗도리를 벗고 곰 인형이 프린트된 하늘색 수면 바지만 입고 있었다. 고동빛 살결은 참기름을 발라놓은 듯 반들거렸고 벽돌을 쌓아놓은 듯한 복근이 그리스 조각상처럼 근사했다. 현관문은 안전 고리 길이만큼 열려 있었다. 나는 그 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혹시 베란다에서 세탁기 돌리느냐고 물었다. 위층 남자는 그런 일 없다고 대꾸하고 현관문을 닫았다.
“세탁기 안 돌렸대.”
“등신아, 그런다고 그냥 내려오냐.”
엄마는 위층 남자가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이 분명하다며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핏대를 세웠다. 나는 엄마한테 단단히 교육을 받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레몬워터」중에서

엄마가 사라졌다. 병원에 암 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로비에서 감쪽같이 없어졌다. 엄마를 잃어버리고 혼자 돌아온 아빠는 소년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할머니는 김치를 썰다가 ‘썩을 년’이라고 욕을 해댔다. 시뻘건 김칫국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삼촌은 실종 신고를 해야 하는지 가출 신고를 해야 하는지 우왕좌왕했다. 나는 이 상황이 상자 속의 미인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 같다고 생각했다.
---「미루나무 등대」중에서

몸에서 가시가 자라요. 여자는 무심히 말했다. 남자는 멀거니 여자를 쳐다보았다. 전에 없이 차분한 눈빛이었다. 남자는 숯불에서 튀는 불똥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남자는 믿지 않았지만 여자의 손에서는 정말 가시가 자라고 있었다. 여자는 손바닥으로 뺨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뭔가가 느껴졌다. 밤송이보다 부드럽고 깃털보다는 억셌다. 그것 때문에 여자는 직장을 잃었다. 피부 관리사의 손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연장이었다. 고객들은 여자의 손이 닿기만 해도 따갑다고 소리쳤다. 여자는 해고되었다는 사실을 남자에게 한동안 말하지 않기로 했다. 직장을 빨리 구한다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가시 여인」중에서

여자에게 쉰이란 숫자는 권태를 의미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날 필요로 하지 않았고 남편은 타인과 다를 바 없었다. SNS에서 내 삶을 근사하게 포장하는 일도, 프티성형에도 이력이 났다. 나는 자신에게마저 무신경한 상태였다. 수영을 마치고 나온 샤워장에서 권태의 이유를 깨달았다. 지은의 나체를 보게 된 것이다. 말라비틀어진 줄 알았던 열정이 깨어나는 걸 느꼈다. 그날 아침 나는 다시 태어났다.
---「아름다운 연기」중에서

바람을 맞아 허옇게 일어난 손에 핸드크림을 발랐더니 금방 촉촉해지고 윤기가 돌았다. 달콤한 복숭아 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알레르기가 있지만 복숭아는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예전 남자 친구였던 세훈은 복숭아 음료를 사 줄 때마다 네가 아는 것은 복숭아 향뿐이라고 놀렸었다. 세훈과 헤어졌던 그해 여름에 나는 세훈이 보는 앞에서 복숭아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가짜라는 말, 두 번 다시 하지 마.
---「길가에 서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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