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시작은 어릴 적 산에서 들에서 부르는 어른들의 일 소리를 들으면서부터였다. 소리가 신병같이 나를 당겼다. 인근에 매굿판이라도 벌어지면 온종일 따라다닐 정도로 신명이 남달랐다.
그러다가 18세에 길을 찾게 되었다. 우연히 진주에서 김수악 명인의 공연을 보고 구음과 장고에 깊이 매료되어 평생 공부의 다짐을 세웠다. 그것이 국악으로의 정식 입문이었다.
대학 시절, 어쩌다 좋은 소리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만사 제쳐 두고 통일호와 완행버스와 통통배를 타고 전국으로 달려갔다. 농촌에서, 산골 오지에서, 때로는 섬마을에서 그들과 같이 모를 심고, 버섯을 따고 낙지를 잡으며 신뢰 관계를 쌓았고, 그 속에서 사투리를 익히고 노래와 문화를 닥치는 대로 배우며 참 행복했었다.
이렇게 방방곡곡 숨어있는 소리를 찾아 여러 어른을 스승으로 삼고 판소리, 구음, 들소리, 상여소리, 중타령, 아라리, 밀양아리랑, 성주풀이, 어산영 등을 배웠다.
그리고 결국 판의 주변인으로 머무는 것이 아쉬워, 아예 20대 후반에는 3년간 실제 굿판에서 장고와 구음을 담당하는 악공으로 들어가 굿 음악을 배우기도 했다. 그 후 전통문화를 보다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여 널리 알리겠다는 포부로, 한 손에 펜과 장고 채를 들고 한 손에는 책을 들고 강의실과 도서관과 현장을 쫓아다녔다.
역마살이 낀 탓일까. 직접 사람과 문화를 전국 구석구석까지 접할 수 있는 방송인을 직업으로 택하여 ‘6시 내 고향’, ‘TV쇼 진품명품’, ‘TV 전국 기행’, ‘달팽이’ 등 많은 기행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지역의 소리와 풍물을 탐구하면서 폭을 넓혔다.
그렇게 40년을 여기저기를 바람처럼 떠돌아다닌 발자국의 기억과 기록이 곳간에 가득 찼다. 내가 과거를 쫓아다니는 동안 세상은 빠른 문명을 동력으로 무섭게 변했다. 그리고 우리가 누렸던 모든 근대 문물이 박물관이나 가야 볼 수 있는 희귀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훌륭한 요리사가 묵은장으로 요리의 제맛을 살리듯이, ‘과거의 잔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어렵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노래가 들리는 글쓰기로 맛있는 밥상을 만들어 보았다.
--- 「머리말」 중에서
6.25 전쟁 이후에는 오일장이 아니더라도 마을을 방문하는 엿장수가 있었다. 리어카에 엿판을 싣고 엿가위를 째깍거리며 등장을 하면, 동네 아이들은 돈이 없고 고물이 없어도 엿 냄새라도 맡기 위해 엿장수를 따라 다녔다.
이들은 곡물이나 공병, 쇠붙이, 고무신, 가죽, 골동품 같은 것을 받고, 그 값어치만큼 엿이나 빨랫비누로 바꿔주는 고물상을 겸하기도 했다. 제일 큰 값어치는 쇠붙이였다. 그때는 어느 집이든지 포탄껍질, 탄피 통, 철모, 기름통 등이 즐비했고 그것을 엿장수에게 갖다 주면 3일을 먹어도 녹지 않는다는 강엿과도 바꿀 수도 있었다.
그다음은 공병이었다. 만물이 귀하던 시절 공병은 유용한 살림도구였다. 최고는 제사나 명절이 지나서 나오는 한 되짜리 ‘정종병’이었다. 그것의 가치는 꽃엿 두 주먹으로 온종일 입을 오물거리고 다닐 수가 있었다. 집집이 석유를 받아오는 누런 정종병이 있었고 파란 막걸리병이 따로 있었다. 참기름, 들기름, 동백기름을 담는 소주병, 박카스 빈 병이 기본으로 10병은 넘게 있었다.
그다음으로 떨어진 고무신이나 토끼 가죽 같은 잡화 고물들이었다. 엿장수가 오는 날은 달콤한 유혹에 홀린 아이들이 어른들 몰래 고물을 가져다주고 엿을 바꿔먹는 바람에 집마다 매타작을 당하는 애처로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중략)
엿장수들은 저마다의 깊은 사연이 있었는데 우리 동네 엿장수는 황해도가 고향으로 전쟁 때 혈혈단신 월남해서 엿장수를 한다고 소문이 났다. 이북 말씨를 쓰는 엿장수는 엿 인심, 비누 인심도 좋고 넉살도 좋아 여기저기 밥도 잘 얻어먹고, 애경사라도 벌어지면 엿장수는 공을 치는 날이라 엿판을 접고 술도 한 잔 얻어먹었다.
엿은 밥도 술도 무엇과도 바꿀 수 있는 화폐와 같았다. 그래서 학교에서 선생님이 내준 산수 문제를 못 풀면 “답은 엿 바꿔 먹었냐.”라며 꿀밤을 얻어맞았다. 이렇게 우리의 달콤하고 황홀한 유혹과도 같았던 엿도 맥을 못 추고 임시 휴업하는 계절이 있었으니 바로 여름이었다.
열기에 약한 엿은 여름이면 질척하게 녹아내려 자르기도 쉽지 않았고 아무리 밀가루를 많이 뿌려도 손이나 옷 어디에나 철썩 들러붙기 때문에 크게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엿의 비수기인 여름, 엿은 녹아내리고 들러붙는 이미지와 성질로 인해 배신한 연인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로 변하였다.
상대방에게 욕으로 쓰는 “엿 먹어라.”가 있었고, 뭔가 직성이 풀리지 않을 때는“기분이 엿 같다.”라고 하였고,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면 “일이 엿같이 되었다.”와 같이 부정적인 의미의 욕으로 쓰이는데, 모두 여름 엿에 빗댄 말이었다.
--- 「1부 엿장수와 아이스께끼」 중에서
흔히 농촌에서 장거리의 논밭에서 수확한 농작물을 옮긴다든지, 팔 물건을 싣고 시장으로 이동을 할 때면, 자전거의 안장에 리어카의 손잡이를 매달아 우마차의 역할까지도 담당했다.
원래 ‘쌀집 자전차, 짐 자전차’라 하여 프레임을 덧대고 짐대를 확장한 큰 자전거도 있었지만, 리어카를 매다는 것이 훨씬 효율성이 뛰어났다. 부피가 큰 짐을 실을 때면 자전거 튜브를 잘라 만든 고무 밴드로 짐을 리어카에 야무지게 묶고 브레이크를 잘 조정해야 했다.
오르막이나 내리막을 만나면 이따금 자전거에서 내려 손발로 속도 조절과 구동을 해야 하는 고단수의 어려운 수송방법이었지만 곧잘 밥값은 했다.
이 자전거·리어카의 운송방식은 평지에는 속도와 탄력으로 쉬운 일이나, 언덕이나 내리막에서는 잘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지는 위험이 있어 중학생이 되어서야 하는 꽤나 실력을 요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자전거의 용도가 꼭, 이동과 운송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자전거의 타이어에는 야간 운전을 할 때 사용하는 헤드라이트용 소형발전기가 달려 있었다.
작은 전구용 발전기였지만 속도를 내면 제법 앞을 훤하게 비추어, 가로등이 없던 그 시절에는 매우 유용한 과학장치였다. 재작스러운 우리들은 그 소형발전기를 연결할 전기선과 들통과 뜰채를 들고 냇가로 달려갔다.
물가에 자전거를 세우고 힘 좋은 친구가 자전거를 젓고 나머지는 전기선 두 줄을 작대기에 연결해서 큰 돌 밑을 지졌다. 맨살의 우리 다리에도 약한 전기가 찌릿찌릿 정신이 바짝 들게 하더니, 이내 피라미, 기름쟁이, 은어가 기절해서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그걸로 매운탕을 끓일 생각에 흥분하기도 하였다.
그 시절에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비포장 흙탕길이 무척 많았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자전거 타이어 바람이 괜찮나 체크를 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웬만한 고장은 집에서 수리하였다. 그래서 집마다 바람을 넣는 바람 뽐뿌 커뮤니케이션이 하나씩 다 있었고, 펑크 정도는 집에서 수리하게끔 튜브조각과 오공본드, 끌, 가위 등을 다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도 자주 벗겨지는 체인을 수리하기 위해, 아예 책가방 안에는 스패너, 펜치, 드라이버, 예비체인 등의 공구 정도는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이것들 때문에 학생주임이 책가방을 뒤질 때 불량학생으로 찍혀 교무실에 끌려다니며 곤욕을 치르기도 했었다.
그렇게 나와 애마는 함께 거의 10년을 넘게, 비나 눈을 맞으면서, 때로는 폭풍 속을 뚫기도 하고, 점점 커가는 나의 몸을 말없이 받아주며, 온갖 풍상을 같이 겪으며 애지중지 보냈다.
도시로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공부에 부대껴 주위 사물들이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나의 공간은 큰 도시로 확장되고 기차와 버스를 더 자주 타게 되었다.
그리고 문학과 철학이라는 것을 공부하면서 녹슨 자전거가 내게 물음을 던졌다. “두 발로 계속 저어야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자전거일까, 인생일까.” 나는 낡은 자전거와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20대를 넘겼다.
그렇게 군대에 갈 때까지 동생들이 함부로 타고 다녔는데, 휴가 때 집에 오니, 대문간에 비를 피해 맨날 세워져 있던 그 자리에 오래된 내 자전거가 사라지고 없었다.
“응 그 고물, 타이어가 다 낡아서 못 쓰게 돼서 고물장수가 왔길래 엿 바까 묵었다….”
--- 「2부 나의 첫 자전차」 중에서
우리는 동네 입구에서부터 나보다 훨씬 큰 나뭇짐을 짊어지고 개선장군같이 어깨에 힘을 한껏 주고 요란하게 지게 작대기로 대문을 밀고 집으로 들어섰다.
나뭇짐이 마당 한쪽에 가득 쌓이면 그 나무로 아버지는 소여물을 삶고, 어머니는 내가 해온 솔가지로 맛있는 저녁밥을 준비하시고, 큰방에 군불을 깊이 지폈다. 부엌 가득 구수한 솔방울 숯에 고등어 굽는 냄새가 퍼지면, 눈이 오려는지 굴뚝에서 내리깔린 연기가 마당에 자욱했다.
지게가 때로는 슬픈 사연을 짊어지기도 했다. 내가 태어나기 6년 전쯤 봄날, 막내 고모는 지금의 내 나이에 장질부사에 걸려 헛소리를 하고 피를 쏟았다. 할부지는 고모를 지게에 짊어지고 읍내 병원으로 달렸다. 사흘 뒤, 고모는 머리카락이 다 빠진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죽고 말았다.
할무니는 기진하여 쓰러지고, 그날 오후에 거적에 둘둘 말은 시신을 할부지의 지게에 지고 가서 와룡산 중턱에 묻었다 한다. 할무니는 이따금 삐죽 나온 막내 발이 꿈에서 보인다고 눈물을 훔치셨다. 그러나 할부지는 끝내 고모의 무덤 위치를 할무니께 가르쳐 주지 않았다. 고모를 직접 묻은 할부지는 봄에 사탕을 들고 산에 올랐다. 그리고 내려올 때는 나뭇짐 맨 꼭대기에 진달래를 한 움큼 지고 내려오셨다.
할부지에 대한 잔상은 지금도 하나이다. 당신 몸보다 몇 배나 큰 소꼴 지게를 짊어지고 그것을 지탱하는 바짝 마른 가냘픈 다리로 집으로 느릿 걸어가는 모습이 전부였다.
할부지는 76년을 사시는 동안 농사일밖에 모르셨다. 아침 일찍 쟁기를 지게에 지고, 소를 앞장세워 들로 나가셨고, 해가 다 지면 역시 소는 맨몸으로 돌아오고 당신은 지게에 쟁기를 짊어지고 지친 귀가를 하셨다. 온종일 일을 한 소에 대한 배려와 고마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아무리 배가 고파도 소여물을 먼저 끓여주고 난 다음, 당신 진지를 드셨다. 할부지의 등은 그가 한 몸처럼 살아온 지게 무게가 짓눌러 지게 굽이처럼 휘었다. 그리고 얼마 뒤 할부지는 논에서 일을 하시다가 그렇게 운명 같은 당신 지게에 등을 기댄 채 자는 듯이 삶을 내려놓으셨다.
할부지의 객사 죽음으로 큰방에다 빈소를 못 차린 아부지는 지게에 맺힌 것이 많은지, 술만 잡수시면 지게에 대한 욕을 퍼부었다.
“저 지게가 천벌이다. 느그 할배는 저 지게가 잡아묵은 기라. 저놈을 안 지려면 우짜든지 공부 열심히 해서 판검사가 돼야 하는 기라. 지지리 궁상들하고 못 배운 것들만 저 지게를 지고 산다. 알것나.”
--- 「2부 지게와 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