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에 감동하며 살았던 날을 새기며
천지가 초록빛이다. 숲 사이로 비치는 맑고 투명한 햇살이 빨갛게 익어가는 산딸기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보랏빛 수국은 흐드러지게 피어 파랗게 갠 하늘의 하얀 양떼구름을 올려다보고 있다. 살아있는 것들 모두, 저마다의 하루를 아름다운 모습으로 장식하며 오롯이 즐긴다.
땅에 발을 딛고 자연 속에 서서 세상 아름다운 것들에 감동하며 살았던 날을 새긴다. 고마운 나날들이다. 고향의 청취를 듬뿍 느끼게 해준 이들, 어려운 일이라도 인간적이고 따스한 마음으로 보듬어 보람이라 여기게 해준 이들, 노력하면 결실이 꼭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었던 분들, 그들의 이야기는 늘 머릿속에서 맴돌다가 글로 이어졌다. 덕분에 대구의료원 최초의 여의사로 출발한 나의 33년 인생도 하루하루 신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감격스러운 경험은 이슥한 밤이면 펜을 잡게 재촉하였다. 아픈 이가 치료되어 웃으며 가는 뒷모습보다 더 벅찬 감동이 어디 있었겠는가.
어린 시절부터 활자로 된 모든 것을 좋아하였다. 책을 들고 있으면 옆에서 불러도 모르고 대답하지 않는다고 어른들로부터 등짝을 얻어맞은 적도 많았다. 어느 집이든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이 있는 곳이었다.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여 번 돈으로 제일 먼저 샀던 것도 세계문학 전집이었다. 누런색으로 빛바랜 공책들, 학창 시절부터 써 내려갔던 습작들, 의과대학 시화전 자료들이 나의 소중한 보물들이다. 제대로 쓰고 싶어 공부하여 수필로 등단하였고 쓰고 지우는 생활에 기쁨을 느끼며 살고 있다. 문학 하는 이들과 만나며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인생을 돌아보기도 하며 공감하는 일상이 즐겁다.
--- 「머리말」 중에서
수능을 마친 수험생들이 속속 확진자 병실로 들어온다. 처음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픈 곳이 있느냐 물으면 잘 모르겠다던 아이들이, 밤이 되자 열이 치솟고 근육통이 심해지는 모양이다. 바짝 긴장된 상태로 칸막이 쳐진 책상에서 말 한마디 못 하고 시험을 보았던 녀석들, 몸의 근육이 이완되기 시작하자 이곳저곳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욱신대는 모양이다. 신음소리조차 크게 지르지 못하고 끙끙대는 아이들을 보니 너무 애처롭다. 더러는 교육 연수원에서 혼자만 격리된 채 시험을 보았다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때 무척이나 외로움 속에서 위로가 되었던 것은 필적을 확인하기 위해 매시간 따라서 써야 하는 글귀였다고 한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 열세 글자를 따라 쓰면서 울컥했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수능 모든 과목마다 답안지에 맨 처음 적어내야 하는 이 필적 확인 문구는 올해로 일흔다섯 살 노시인이 젊은 날 쓴 사랑 시에서 나왔다. 시인은 어린 분들이 더 힘든 한 해였을 거라며 “힘든 시간을 지나, 살아내자”라고 말했다. 필적 확인 문구를 답안지의 필적 확인란에 정자로 기재하도록 하는 시간이 매 시험 시간 시작에 주어지는데, 올해는 나태주 시인이 젊은 날 한 사람을 위해서 썼다는 시 〈들길을 걸으며〉의 한 구절이었다.
수능을 보던 49만 수험생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 시인은 인터뷰에서 소망하였다. “이 글이 많은 사람에게 가서 그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사람이,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다’/이렇게 느끼기를 바랐다.”라고.
수능시험에서 필적 확인 문구는 2006년 도입되었다고 한다. 직전 수능에서 대규모 부정행위가 드러난 까닭에 이듬해 모의고사에 윤동주의 〈서시〉를 앞세운 것이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의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은 세 번이나 인용되었고,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도 인용되어 수험생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을 적고 나서 마음의 평정을 찾아 시험을 잘 보았다는 조카도 그때를 기억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포항지진으로 시험 전날 수능 연기 사태를 겪었던 2017년엔 김영랑의 〈바다로 가자〉가 놀란 수험생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시를 사랑하는 후배의 딸이 수능을 볼 땐 김남조 시인의 〈편지〉의 첫 구절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가 나와서 가슴이 두근거렸다며 감동을 전하였다. 열다섯 자 내외의 짧은 문구가 같은 어려움을 겪은 수능 세대들 마음엔 정말 오래도록 남아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될 것이리라.
오래도록 병상에 있다가 회복하여 가슴을 울리는 짤막한 시들을 발표하는 나태주 시인은 동그랗고 친근한 얼굴로 수험생들을 향해 또 우리 모두를 위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힘들었어요. 터널을 건너왔어요. 저 너머에 분명히 좋은 들판이 있을 겁니다. 같이 갑시다. 힘내세요.”
--- p.80~82, 「위로,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중에서
검은 먹구름을 따라 한차례 소나기가 쏟아지고 난 하늘은 원래의 색을 되찾은 듯 산뜻하게 맑고 밝은 푸른빛이다. 마음은 흰 구름처럼 두둥실 떠오르고 발길은 절로 텃밭으로 향한다. 텃밭의 아이들은 비에 젖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못내 궁금하여 신발도 제대로 끼우지 않았는데도 발길은 벌써 그쪽으로 향한다.
얻어다 심은 목화는 벌써 한 뼘이나 자랐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던 뜨거운 여름날을 어찌 그 어린 것들이 견뎌 냈을까. 주말이 되어도 바쁜 일이 생기면 들르지 못하는 시골이라 얻어다 심기는 했지만 그들의 생사가 내내 걱정되었다. 목화꽃을 제일 좋아한다는 한 아이 엄마가 가져다준 목화 모종, 그녀는 티끌 하나 없는 연한 아이보리색 옷을 입고서 목화 모종을 손에 들고 하염없이 웃고 서 있었다. 고마워서 가져왔다는 그녀의 모습이 정말로 순수해 보여서 거절하지 못하고 두 손을 마주 잡고 웃어 주었다. 목화가 잘 자라나면 어디선가 그녀의 아이들도 사랑스럽고 포근하게 잘 자라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한국어가 서툰 아이의 엄마는 정말이지 무엇이라도 자신이 일을 하면서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아이가 성조숙증으로 치료받게 되었을 때, 그녀는 목화솜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무슨 검사든지 필요하면 모두 해서 아이에게 큰일이 생기지 않게 해 달라고 말하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목화 모종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중략)… 아이의 어머니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혹시라도 모를 뇌 이상 유무를 확인해야 마음 놓고 치료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흔쾌히 동의했다. 치료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할 것이라면서 MRI(자기공명영상) 촬영에 동의서를 작성해 내민다. 어떤 일이라도 늘 긍정적으로 여기며 항상 밝은 표정을 짓는 그녀의 일상에 아무런 먹구름이 끼지 않기를 바라며 작성한 동의서를 훑어보았다. 설명을 잘 알아듣고서 일일이 자필로 작성한 그녀의 글자를 보다가 한 곳에 눈길이 자동으로 멈추는 것이 아닌가.
‘관계’라는 항목이었다. 작성한 사람이 검사받을 아이와 어떤 사이인지를 밝히는 곳이다. 아버지라면 통상 ‘부父’를 적고, 어머니라면 ‘모母’라고 쓴다. 한자를 배우지 않은 세대는 ‘아빠’, 또는 ‘엄마’라고 적고 외국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사람은 더러는 DADDY, MOMMY 하고 적는 칸이다. 그곳에 목화 같은 그녀가 적은 글자는 얌전하게 앉은 모습의 ‘좋은’이었다. 자기 아들과 그녀 사이가 나쁘지 않고 좋다는 뜻이리라.
그 글자가 나를 웃음 짓게 하기보다는 묘하게 가슴 깊은 곳을 찌르르 울렸다.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오래 살고 부지런히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문화에 적응해 가더라도 정말이지 속속들이 완벽하게 따라잡기는 힘 드는가 보다 싶어서.
--- p.119~121, 「위로, ‘좋은 관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