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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여행의 시작 호주 브리즈번에서 정원사로 일하다 동화 같은 마을, 틸바에서 정원사로 일하다 멜버른 백패커스 무전취식 아프리카 남아프리카 공화국 행복했던 케이프타운에서의 두 달 로빈아일랜드에 가다 걸인에게서 배우다 가든 루트, 아름다운 정원의 길 컴퓨터 선생님으로 일하다 프리토리아에서 만난 친구, 존 할아버지 잠비아 건축가로 일하다 초마에서 만난 사람들 가나 가나의 어촌마을 오토바이 수리점에서 일하다 부르키나파소 문명이 빗겨간 부족, 티벨레 오가두구에서 만난 그의 처제 말리 나의 여행이 그들의 삶 속에서 모리타니아 국경을 넘는 사람들 사막의 어둠이 가져간 카메라 모로코 프랑스 할아버지와 함께한 치유의 4일 모로코의 삶 속으로 예술 제본가로 일하다 리다와 함께한 봉사활동 아프리카, 나를 놓아줘~ 신의 섭리 유럽 스페인 친구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 산속의 히피 공동체, 베네피시오 잊지 말아야 할 것들 예술의 도시, 바르셀로나 전시회장에서 일하다 프랑스 산장 수리공으로 일하다 나에게 여행이란 파리에서 정원사로 일하다 사랑을 찾아 파리로 온 남자, 맥시밀리아노 영국 겨울 빗속의 도보여행 나는 아프가니스탄 사람입니다 네덜란드 정육사와 제빵사로 일하다 젖소 농장에서 일하다 독일 일일 소방대원이 되다 나무꾼으로 일하다 목공소에서 일하다 독일에서 만난 한국 여행을 정리하며 에필로그 |
2008년 8월 12일, 낙찻(Nouakchott)에서 오후 5시에 탄 버스가 사하라 사막, 모래의 바다를 달려, 6시간 만에 모리타니아 북쪽 끝 작은 마을 노아디부에 도착하였다. 밤 11시를 넘긴 사막의 싸늘한 밤공기에 나는 잔뜩 움츠린 몸으로 택시 기사들과 숙소까지 가격을 흥정하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기사들 가운데, 선뜻 200우기야로 데려다 주겠다는 기사가 있어 트렁크에 짐을 싣고 조수석에 앉았다.
낯선 사막의 어둠 속에서 혼자 택시를 탄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몇 안 되는 가로등이 가까스로 사막의 어둠에서 마을을 밝히고, 달리는 차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차가 어둠 속을 달리다가 다시 밝은 길로 접어들면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달렸을 때 차는 마을을 빠져나가 어두운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난 이미 그 전에 몇 차례 반복했듯이, 이번에도 가로등 없는 어두운 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5분여를 더 달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마을은 저 멀리 있고 차는 사막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봐, 멈춰! 멈춰!! 멈추라고!!!” 그는 거칠게 차를 세웠고 차가워진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무어라 날카롭게 외쳤다. 나 또한 질세라 고함을 꽥 질렀다. 서로를 노려보는 그 짧은 순간에 좁은 공간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스쳤고, 나는 가방을 움켜쥐고 차 문을 박차고 나갔다. 10여 미터를 달린 후 가벼워진 손을 느꼈고, 돌아보니 그가 차에서 내려 땅에 떨어진 내 카메라 가방을 집어 들고 만족한 듯 운전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가 멈춰 서 있는 나를 보고는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트렁크를 열고 내 큰 배낭을 던졌다. 그는 마치 ‘이 가방 줄 테니 그냥 가는 게 좋을 거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그의 손 안에 있는 카메라를 되찾는가에 대한 생각이, 심장 터질 듯한 두려움만큼이나 커져 있었고 그렇게 꼼짝 않고 있는 나를 본 그는 트렁크에서 무언가 찾기 시작했다. 끝이 날카롭게 구부러진 쇠꼬챙이가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을 봤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죽음이라는 내게 미처 준비되지 않은 공포가 엄습해 왔다.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던 사람들의 진부한 증언들이 늘 그렇듯이, 나 또한 그 평범함을 넘지 못하고 그간의 삶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것은 쇠꼬챙이가 달빛에 번쩍이는 순간처럼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막의 엄숙한 역사처럼 영원한 것이기도 했다. --- ‘프롤로그’ 중에서 |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체험했는가’에 대한 이야기!
“재혁아, 이런 건 어때? 세계 곳곳에는 여러 가지 일이나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아. 세계 곳곳의 청년들이 함께 모여 땀 흘려 일하고 있지. 일하며 보람도 찾고 세계인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힘들겠지만 가치 있는 일 년이 되지 않을까?”
20대의 여느 대학생들처럼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저자에게 선배가 한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저자는 주인집에 당장 자취방을 빼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책상에 앉아 노트에 다음과 같은 다짐들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1. 여행하는 동안 어떤 이유에도 절대 내 자유를 양보하지 않을 것 2. 발길 닿는 곳 따라 여행하되 떠남보다 순간순간의 정착에 더 큰 의미를 둘 것 3. 만나는 모든 대상들에게 ‘행복’에 대하여 물어볼 것 호주와 아프리카, 유럽 등의 13개국을 통해서 이루어진 그의 여행은 놀고 즐기는 것보다는 대부분이 현장체험 중심으로 현지인과 교감하며, 그들의 삶을 함께 느껴볼 수 있게끔 진행되었다. 비용 또한 최소한으로 장거리 교통비 정도만을 사용했으며, 현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대부분 일을 하며 끼니를 해결하고, 잠은 텐트를 들고 다녔고, 가까운 거리는 걷거나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했다. 여행 루트를 보면 호주에서는 농장에서 일을 하거나 브리즈번과 틸바에서 정원사로 일을 하고, 멜버른 백패커스에서 무전취식을 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이어진 아프리카 대륙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걸인을 만나 삶의 참의미를 배웠고, 현지 아이들을 위한 컴퓨터교육 선생님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 또한 잠비아에서 건축가로 일을 하고, 가나에서는 오토바이 수리점에서도 일을 했다. 그러나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이 모두 다정한 이웃 같지만은 않았다. 문명이 빗겨간 부족 티벨레를 경험한 부르키나파소를 거쳐 말리에서 무시무시한 모래바람이 총알처럼 몸을 할퀴며 지나갈 때엔 세상의 모든 것을 지워져버린 듯 당혹스러웠다. 아프리카 특유의 피부병과도 싸워야 했고, 모리타니아에서는 택시를 탔다가 사막 한 가운데서 강도로 돌변한 택시가사로 인해 카메라와 배낭을 빼앗기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프랑스 할아버지와 함께한 치유의 4일을 보냈던 모로코에서는 책표지의 예술 제본가로 일을 하였고, 낙후된 시설의 학교에서 페인트칠을 하며 봉사활동에도 참여했다. [유럽] 이후 유럽에서는 오래된 건축물 등 비교적 다양한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산속의 히피 공동체 베네피시오를 방문했던 스페인에서는 예술의 도시 바르셀로나를 경험했고, 전시회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산장 수리공으로 일을 했던 프랑스에서는 정원사로도 일을 했으며, 영국에서는 30킬로그램의 배낭을 메고 일주일간 겨울 빗속에서의 도보여행을 만끽(?)했다. 정육사와 제빵사로도 일을 경험했던 네덜란드에서는 젖소 농장에서 일을 하고, 일일 소방대원으로 체험을 했던 독일에서는 나무꾼 일과 목공소에서도 일을 해봤다. 여행을 정리하는 단계인 독일에서 만난 한국인 2세들의 한국어 수업 참관과 간호사로 이민을 가서 노년의 향수로 가슴을 적셔야 하는 한국 교민들과의 송년 만남에서는 “한국에서 살고 싶고, 기꺼이 한국에서 죽고 싶다”는 여행 후에 얻은 고국에 대한 절절한 사랑 또한 확인했다. “여행은 강렬하게 만나고 애틋하게 헤어짐의 반복이다” 건축학도였던 저자의 그림과 사진이 곁들여진 《나침반 여행》은 여행을 통한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를 강렬하고 애틋한 사랑으로 그렸다. 저자는 “강렬히 만날 수 있어야 애틋한 헤어짐을 할 수 있듯이 만남과 떠남을 필연적으로 반복하게 되는 여행에서 그것들이 다시 여행의 일상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조금 적게 만나더라도 강렬한 만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랬을 때 애틋한 헤어짐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이 책은 MP3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음악들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낯선 나라에서 오직 저자 자신을 위해 연주했던 기타리스트의 연주처럼 그런 강렬한 만남에 대한 이야기들과 다름 아니다. 여행 후 현재 건설회사에서 입사하여 근무 중인 그는 “여행에서 돌아와 가장 두려웠던 것이 여행 중에 던졌던 ‘물음’들을 점점 잊어버리는 나를 힘없이 바라보는 것이었다”며 “때론 그런 망각들이 한국 사회 현실과의 타협에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나, 내가 원했던 것은 ‘타협’이 아닌 ‘조화’였다”고 밝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