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랑 저 친구들도 조신한 스타일이긴 해요. 근데 우린 그런 말은 별로 달갑지 않더라고.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우리가 늦게 깨달은 거긴 하지만요.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오라는 데도 없고.”
“나도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은데.”
추이란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버렸다.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버린 게 아쉽네요.”
“그쪽이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요. 웨이보가 빠져드는 여자는 죄다 조신한 스타일이라는 거. 웨이보는 그쪽이 조신하다는 말을 굳이 하더라고요. 근데 난 그 말 안 믿어. 조신한 여자가 무슨 허구한 날 이런 데를 다니느냔 말이지.”
룽쓰샹이 끊임없이 곁눈질하며 말했다. 무언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억누르려는 것처럼. 추이란은 룽쓰샹이 참 못난 얼굴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말 많은 여자는 입을 열기만 하면 묘한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 p.17~18
“왜 난 여태 그 사람이 그런 폭력적인 남자인 줄도 몰랐을까?”
“사람 잘못 본 거 아니야.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 건데 그 사람이 변한 거지. 종종 있는 일이야.”
--- p.91
“‘제보자’다. 난 저런 게 좋아. 저러고 있는 게 바로 세계 종말 아니야? 봐, 저 사람 일어났어. 아이고, 또 쭈그려 앉네. 저 사람 옆에 아카시아가 있다. 키스해줘, 아니, 여기다 해줘. 아, 진짜 좋아. 나 저 노인 사랑하는데, 믿어져?”
--- p.98
아쓰의 직감으로 어머니는 결코 좌절하지 않는, 절대 타락하거나 엇나갈 리 없는 여자였다. 아쓰는 혼잣말을 했다. ‘돼지우리에 살면 또 뭐가 어때서? 마음만 깨끗하면 되는 거 아닌가?’
--- p.108
세 사람은 술기운에 차츰 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서로가 서로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이들은 조롱박 비닐하우스 앞뜰에서 같이 자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p.126
“어떤 때는 나도 아예 감옥에 들어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한다네. 그럼 더 잘 사유할 수 있을 테니까. 내 생각 어떤가?”
“괜찮은 생각인데요? 난 왜 여태껏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내가 이렇게 편협하다니까. 우리 아버지는 똑똑하신데, 난 아버지를 하나도 안 닮았답니다.”
--- p.139
“난 이렇게 도로에서 어슬렁대는 걸 가장 좋아한다네…… 화장도 지우지 않고 다니는 거지. 귀신처럼 보이게 말이야. 이러고 돌아다니면 죽은 남편이 보이기도 한다오.”
--- p.142
“집이 있어서 정말 좋겠다. 나한테 그런 건 천국이 있다는 말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인데. 난 이미 늦었다는 말이야. 망령들과 약속이 있어서 매일 밤 오래된 무덤에 들어가서 자야 한다고. 근데 자네는…… 모든 기회가 다 자네 거잖아.”
--- p.146
“누가 그러는데 그 여자 정신이 나갔대.”
“그럼 또 뭐 어때서? 우리도 정신이 온전한 건 아니잖아.”
--- p.154
“여기 앉아서 자기 가족이 살았던 모습을 상상해보니까 내가 전에 방직공장에서 했던 생활이 문득 떠오른다. 그 큰 들통 속에서는 지구 중심에서 전해지는 우르릉 소리가 들렸거든.”
룽쓰샹이 한참 이야기하고 있을 때, 밖에서 웬 짐승이 방문을 움켜쥐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어떻게 들어오는 건지 모르는 것 같았다. 짐승은 몸집이 산양만 했지만 산양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방으로 들어오더니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짐승은 고집이 세 보였다.
“사람을 해치지 않을까?”
룽쓰샹이 조그만 목소리로 라오융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야, 우리 아버지인데.”
--- p.174
샤오위안은 자기 마음의 끝없는 심연이 된 닥터 류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닥터 류가 잊히지 않았다. 코뿔소 뿔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 해도 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가 마음속 심연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 p.198~199
“시골에 있을 때 사람들이 저더러 아무 가치도 없는 목숨이라고 했어요. 귀신 소굴로 떨어질 거라면서.”
아량이 말했다.
“맞는 말이네. 겁은 안 나니?”
“설레어요. 저는 그런 삶이 좋거든요.”
--- p.230
“당연히 사랑 때문이죠. 오빠, 저는 밤마다 마을 사람들과 같이 모여요. 작은 클럽이 있거든요. 온통 코스모스로 뒤덮인 곳이어서 쥐들이 왔다갔다하는 곳이에요. 우리는 모두 여덟 명인데, 같이 노래도 불러요. 옛날 노래들이요. 사실 고향에 있을 때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어요. 날 우물 안으로 밀어버리고 싶어했다고 어젯밤에 털어놓은 여자애도 있을 정도로요. 걔가 상세하게 자기 계략을 설명해주더라고요. 어째서인지 모두 아름다운 음모라고 생각했어요. 오빠, 자요?”
--- p.256~257
연락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연락, 그리고 식물끼리의 연락이. 그런 연결이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고, 꼭 바람이 하는 일 같다고, 닥터 류는 생각했다. 당시에 닥터 류는 진료소 입구에 서서 세 사람을 맞이했다. 세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진료소로 들어왔다. 밖에서는 제법 많은 아이가 바람을 맞으며 소리를 질렀다. 닥터 류의 마음속에서도 많은 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 p.282
위씨 노인은 대도시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내면’에서 온 사람일 터였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그 세 사람처럼. 노인은 남쪽 대도시에서 왔다고 했지만 자신이 ‘내면’에서 온 사실을 감추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내면’은 어떤 곳일까? 닥터 류는 알 수 없었다. 청목향 같은 약초와 관계있는 듯했다.
“저기 봐봐, 아편 판매상의 여자가 집 지키는 개처럼 버티고 있어.”
남자가 말했다.
“저게 바로 사랑이야.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이것저것 재지 않고 다 내어주는 것.”
“저 여자는 쓰레기야. 조만간 맞아 죽을 거야.”
여자가 상기된 어조로 반박했다.
“그러는 넌? 너는 쓰레기 아니야? 아, 넌 독이 든 박쥐지.”
남자가 갑자기 하수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아쓰는 순간 번뜩이는 칼날을 봤다. 여자가 한 짓이었다.
--- p.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