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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여전히 당신

시인동네 시인선-220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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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1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82g | 125*204*20mm
ISBN13 9791158966256
ISBN10 1158966253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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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이 길은 책을 닮았어요 몇 발자국 걷다 보면 한 페이지가 지나가요 보리수 열매를 찾으려니 휘리릭 다음 문장들이 펼쳐져요 어떤 풀숲에서는 후두둑 빗소리에 갇혀 있었지요 우두커니 한 글자만 바라볼 때도 있었고 그런 날은 어릴 적 슬픈 생각을 많이 한 날이기도 해요

오늘은 무슨 기념일인 거 같아 두근두근 흘러가는 천변에서 날짜를 헤아렸어요 누추한 날들이 너무 많아서일까요 수치스러운 문장들은 왜 하필 이 길에서 또렷해질까요 독해가 어려웠던 날들, 믿어지지 않았던 행간들, 그러나 끝내 설명하지 않는 부호들…… 울먹이며 읽고 울먹이며 묻기도 했던 그 마음이 있어서인가요? 살수록 물음표가 더 좋아졌지요 날마다 다른 뜻이 있는 거 같아서

이번 생도, 어차피 한 권의 책이려니…… 혼자 밑줄 그으며 걸어가는 석양빛, 그러나 늘 꿈꾸고 사랑했던 시간들 내가 이토록 애독하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그래요 그래서 오늘은 천천히 조금 더 천천히 걸을게요
---「조금 더 천천히 걷기」중에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물 흘릴 때마다 그 눈물을 보관하는 유리병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대부분 눈물 병을 몇 개씩은 지니고 살았다는데, 그 눈물 병은 주인이 죽었을 때 무덤 속에 같이 넣어 (천사가 눈물 병을 소중히 안고 천상으로 올라가 바치기 때문) 명복을 빌었다는데, 생전에 시편 백오십 편을 지은 다윗 왕도 이 눈물 병을 지녔다고 하는데, 그 지극한 눈물 못지않은 시인들의 시집이 원조 그 눈물 병은 아닌지, 시집들을 들여다보면 행간 사이사이 눈물 자국들 푸르게 아리게 스며 있는데, 오늘 한 젊은 시인이, 걸식을 하더라도 시만 쓰고 살면 좋겠다고, 눈물 글썽이며 벚나무 아래서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눈물 병(甁)」중에서

창문 앞 동산이 꽃을 피우느라 눈을 감았다 떴다 어지러운가 보다
좋은 시 몇 편 옮겨오는 나도 어질어질
눈가가 침침하다

아침부터 시 읽기에 잠기고 꽃 번짐에 잠기다
저 봄볕에 화르르 발가벗고 싶은 충동

몇 년째 코로나19 마스크를 하고
내뱉은 숨을 내가 다시 먹고 살아도

봄은 여전히 봄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라고 읽는
이 기묘한 날들의 후렴구
---「당신은 여전히 당신」중에서

누엣머리를 닮았다는 무주 잠두에 와서
야생 복사나무를 보고 있는데
꿈속의 복사나무 꽃밭을 보고 있는데
애인도 아닌 사람이 자꾸 문자를 보낸다

어젠 밤새 비 내리고 바람 불고
그사이 잠두마을 복사꽃은 다 지고
나는 다 져버린 꽃 진 자리 배꼽만 보고 있는데

언제 사라졌다 다시 왔는지
버들잎 길게 풀어놓은 벼룻길 강물

애인도 아닌 사람은 여전히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프니 봄이라고
톡톡

그러나 아직 흐르는 꽃이여 꽃이여,
불현듯 눈시울 붉은 도화연의 뱃길
도화살 붙은 몸과 몸이 후들후들 지나가고

그러다 홀연히
아주 홀연히

나비가 된 전생의 나를 만날 거 같은
내가 전생이 된 나비 한 마리 날아올 거 같은
---「내 몸이 지나가네」중에서

집을 떠나가고 싶은 적 한두 번이었나
어둠 속 눈 맞는 풍경들이 순간 또 순간 흔들리며 모습을 버린다
슬그머니 창밖으로 몸을 내민다
함박함박 떨어지는 눈송이들, 한 채의 집
내가 버린 기억들이지
그 속엔 쓰다 만 시집 한 권의 문장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루하루가 어느 누구의 하루이기도 했다
이해하려고 애쓰며 그 마음을 돌았지
일 년 내내 그랬어

이제 그 앞마당에 눈이 내린다
누군가 불현듯 초대해 준 낯익은 곳
들여다보니 비로소 내 얼굴이 보인다
눈송이들이 내장된 그 모습들을 똑바로 찾아내고 있다

슬프다고 눈물을 모아둔 곳
아프다고 새벽이면 대문을 따고 달아나고 싶었던 곳
나무의자에서 늘 쓰디쓴 풀냄새가 나던

지울 수 없는 후회들을 지우라고 차마 하늘은
한 페이지를 이렇게 남겨놓으셨나
종소리처럼
---「어느 십이월의 페이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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