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너머에서도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조반니 파올로 판니니의「화랑」작품들을 예로 들어 보자. 이 그림들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들만 보여 주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니다. 그려진 것들은 단지 하나의 예일 뿐이며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나머지 컬렉션들까지도 말해 주려는 의도가 이 그림들에 담겨 있다. 보스Bosch의「쾌락의 동산」은 어떤가. 이 그림은 그것이 암시하는 놀라운 일들이 그림의 경계를 넘어서도 계속되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카르파초의「아라라트 산에서의 순교자 만 명의 십자가형과 영광」이나 폰토르모의 「만 천 명의 순교자들」도 다를 게 없다. 확실히 그림 속에서 십자가에 박힌 사람들의 수는 만 명이 아니며 고문당하는 사람들은 그림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들이 캔버스 경계 너머에서도 계속해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야기하려는 의도가 있음은 분명하다. 어찌 보면 이 그림들은 그 모든 사람의 이름을 하나하나 대지 못하는 (다시 말해서 그들 하나하나를 보여 주지 못하는) 그림 자신의 무능함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로도 느껴진다. --- p.39
네덜란드 정물화는 세속적인 사물의 덧없음을 암시하는 목록
과일이나 고기, 생선을 묘사한 네덜란드 정물화들은 겉보기에는 그 자체가 하나의 형태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물들이 하나의 프레임에 의해 경계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며, 또한 보통은 정물들이 가운데에 쌓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그림에는 제시된 정물들이 주는 풍부함의 효과,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다양성의 효과를 노리는 의도가 너무도 뚜렷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정물화들을 시각적 목록의 예로 포함시킬 수 있다. 그리고〈바니타스Vanitas〉라고 알려진 네덜란드 정물화, 다시 말해 겉으로는 아무런 상호 관계가 없는 듯한 사물들을 뒤섞어 놓고서, 그 모든 것이 썩기 쉬움을 나타내면서 우리에게 세속적인 사물의 덧없음을 생각하게 만드는 그림들에도 목록에 대한 암시가 담겨 있다. --- p.44
목록의 형식을 취한 음악
원칙적으로 보면 목록은 다른 형태의 예술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강박적인 리듬이 반복되는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볼레로」는 그 곡이 무한히 계속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립친스키Rybcznski 같은 예술가가 그 곡에서 영화의 영감을 끌어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립친스키의 영화「오케스트라」에서 특정 등장인물들(러시아 혁명 지도자들 가운데서 감독이 선택한 인물들이지만, 이들은 일곱 번째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천사들이기 때문에 형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은 어쩌면 끝이 없을 것 같은 계단을 올라간다. --- p.47
민중 봉기의 어마어마한 규모
장소의 축적과 관련해서 빅토르 위고의 소설『93년』에는 방데 지역의 지명들을 열거한 목록이 나온다. 랑트냐크 후작은 뱃사람 알말로에게 그 모든 곳을 일일이 지나면서 봉기를 일으키라는 명령을 전달하라고 지시한다. 가련한 알말로가 그 엄청난 목록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위고 또한 독자들이 그 많은 지명들을 모두 기억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방대한 공간 목록은 단순히 민중 봉기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암시하려는 의도일 뿐이다. --- p.81
돈 조반니가 유혹한 여인들
비록 음악과 운문으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실용적인 목록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모차르트의「돈 조반니」에 나오는 레포렐로의 목록이다. 돈 조반니는 수많은 시골 여인네, 하녀, 도시의 숙녀, 백작 부인, 남작 부인, 후작 부인, 공작 부인 등 계층과 외모,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온갖 여인들을 유혹한다. 하인 레포렐로는 주인의 그 편력을 정확한 장부로 만드는데, 그의 목록은 수학적으로 완전하다. 〈이탈리아에서는 600 하고도 40명, 독일에서는 231명, 프랑스에서는 100명, 터키에서는 91명,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이미 1천 명 하고도 세 명입니다.〉이것을 모두 합치면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정확히 2,065명이다. 만약 돈 조반니가 그다음 날 도나 안나나 체를리나를 유혹한다면, 새로운 목록이 만들어질 것이다. --- p.116
신은 곧 목록이다
중세 문학에서 목록은 신의 속성을 규정하기 위한 하나의 질문이었기 때문에, 목록을 이루는 항목들은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아레오파고스의 가짜-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신은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무어라 명확히 말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5세기 파비아의 주교 엔노디우스Ennodius는 그리스도에 관하여〈근원이자 길이요, 권리, 바위이자 사자, 빛을 지닌 자, 양이시며, 문이자 희망이요, 미덕이며, 말씀이며, 지혜요, 예언자이시며, 제물, 어린 가지, 목자, 산, 그물, 비둘기이시며, 불꽃, 거인, 독수리, 배우자, 환자, 벌레이시며……〉라고 말해야 했다. --- p.133
목록의 도시 로스앤젤레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중심 광장 주변에 건설된 도시를 떠나〈메인 스트리트〉에서 계속 뻗어 나가는 미국의 도시로 옮아가 보자. 도시의 척추 역할을 하는 그 길은 무한하게 연장될 수 있고, 점차로 뻗어 가는 도시에서 그 중심은 아주 자연스럽게, 날마다 더욱 커져만 가는 교외 속으로 이동하며, 따라서 그 도시가 어디서 끝나고 외곽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구분하기가 때로는 힘들어진다. 이것은 결국 우리를 〈도시 영역〉으로 이끄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로스앤젤레스이다. 이 도시는 중심지가 따로 없으며 사실상 도시 자체의 외곽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로스앤젤레스는 〈기타 등등〉의 도시이며 따라서 만약 우리가 그 은유를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로스앤젤레스는〈형태 도시〉라기보다는〈목록 도시〉가 된다. --- p.240
남자의 성기를 지칭하는 그 많은 형용사들
질서에 대한 요구는 그 시대 소르본 대학의 학식 높은 박사들을 고무했지만, 이런 풍조를 경멸이라도 하듯 엄청난 목록을 만들어 낸 작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라블레였다. 궁둥이를 닦는 듣도 보도 못한 수많은 방법들이나 남자의 성기를 지칭하는 그 많은 형용사들, 적을 호되게 혼내는 갖가지 방법들, 생빅토르 수도원에 보관된 쓸모를 알 수 없는 많은 책들, 온갖 뱀의 종류라든가 가르강튀아가 할 줄 아는 수많은 (그리고 그 많은 놀이들을 모두 즐길 그 엄청난 시간을 만들 방법은 오직 신만이 아는) 놀이들을 열거하는 방식에는 이렇다 할 이유가 전혀 없다. --- p.249
세계를 개편하는 수단
호메로스가 목록에 의지했던 이유는 언어와 혀, 입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으며, 형언할 수 없다는 표현 자체는 오랜 세월 동안 목록의 시학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조이스나 보르헤스가 끌어낸 목록을 보면, 그들이 목록을 만든 이유는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과잉에 대한 애정에서, 오만함에서, 단어에 대한 욕심, 그리고 복수와 무한에 관한 즐거운(그리고 드물게는 강박적인) 과학을 향한 욕심에서 사물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목록은 이제 세계를 개편하는 한 방법이 되면서, 거리가 먼 사물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끌어내기 위해, 그리고 어쨌거나 상식으로 받아들인 것들에 의구심을 던지기 위해 속성들을 축적하라는 테사우로의 권유를 실천하다시피 한다. 이렇게 해서 혼돈의 목록은 형태를 붕괴시키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미래주의, 큐비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신사실주의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추진했던 것이 바로 형태의 붕괴였다. --- p.327
마르크스의 목록
다양한 미의 목록을 제공하는 일은 매스 미디어를 탄생시킨 사회의 특징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자본론』앞부분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는 엄청난 상품들의 축적으로 그 스스로를 드러낸다.〉이와 같은 광범위한 축적은 다양하고 상징적인 장소에서 나타나는데, 그 하나가 가게 진열창이다. 전시된 물건들이 지나치게 많은 경우가 가끔 있지만, 진열창은 그 물건들이 우리가 그 가게 안에서 찾게 될 것들 가운데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는 것을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 p.353
백화점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록!
19세기의 한 파리 안내서는 갤러리를〈대리석 벽 속에 끼워 넣어져 유리로 덮인 복도〉로 정의한다. 그곳에는〈가장 품위 있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에〈이런 부류의 갤러리 하나가 하나의 도시이며, 사실상 하나의 초소형 세계이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백화점이 있다. 졸라가『부인들의 행복Au Bonheurde dames』에서 격찬했던 백화점은 그 자체가 진정한 하나의 목록이다. --- p.354
모든 목록의 어머니, 인터넷!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목록들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끝없이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정의상 무한한 그것은 바로 월드 와이드 웹이다. 그것은 정연하게 가지를 뻗어 가는 나무가 아니라 거미집이자 미궁이며, 온갖 현기증 중에서 가장 신비적이면서도 거의 완전히 사실적인 현기증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우리가 부유하고 전능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정보들의 카탈로그를 실제로 제공해 준다. 단 하나의 문제가 있다면 거기에서는 더 이상 사실과 오류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그 요소들 가운데 어느 것이 실제 세계의 데이터를 가리키는지, 그리고 어느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다.
--- p.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