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는 유달리 ‘사랑’에 기대를 걸었다. 그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그가 소망하는 세상에서는 오로지 사랑만 강요되었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 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p. 213). 이렇게 사랑을 강요하기 위해 그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점을 아들 영수는 못마땅해했다. 사랑 없는 사람을 처벌하기 위한 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면 현 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큰아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영수는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서 법률 제정이라는 공식을 제거하고 대신 교육을 통해 “누구나 자유로운 이성에 의해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누구나 고귀한 사랑을 갖도록 한다”(p. 213)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점점 악화되는 노동 환경과 어처구니없는 노사 협상 과정을 경험하면서 영수는 생각을 바꾸기로 한다. 아버지가 옳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비관의 심연으로 내려간다.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은강에서는 신도 예외가 아니었다”(p. 234, 이상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결국 난장이가 꿈꾸었던 사랑의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법의 제정도 불가능했고, 교육을 통해서도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것이 난장이와 그의 가족들이 작은 몸으로 큰 고통을 감당하며 세계와 불화하며 불안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작은 난장이가 그렇게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현실 앞에서 작가 조세희는 절망했다. 실어증 환자처럼 고통받았다. 작가 또한 큰 몸이 아니었다. 작은 몸으로 시대의 큰 고통을 감당하려 애썼다. 고통의 현장마다 그 작은 몸이 큰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거리에서 그는 근원적인 각성과 실천이 이어지기를 소망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는 노동자로서 각성하고 성장해나가는 영수의 이런 노트 대목이 제시된 바 있다.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세대와 세기가 우리에게는 쓸모도 없이 지나갔다. 세계로부터 고립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무엇 하나 주지 못했고, 가르치지도 못했다. 우리는 인류의 사상에 아무것도 첨가하지 못했고…… 남의 사상으로부터는 오직 기만적인 겉껍질과 쓸모없는 가장자리 장식만을 취했을 뿐이다”(p. 110).
이런 영수의 고뇌를 작가 조세희는 초지일관 붙들고 추구했다.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진정한 눈물을 흘릴 것, 그 눈물을 통한 각성으로 세계에 가르칠 만한 새로운, 소망스러운 희망의 사상을 제출할 수 있을 것, 그것이 작은 몸으로 쏘아올리고자 했던 ‘작은 공’이었다. 그것은 『침묵의 뿌리』에서 한 학교의 교훈으로 제시된 것이기도 한 큰 과제였다. 작은 몸으로 큰 고통을 감당하며, 이 웅숭깊은 교훈 같은 큰 과제를 수행하려 했던 큰 작가 조세희 선생께서 2022년 12월 25일 ‘반 줌의 재’로 남은 난장이 곁으로 돌아갔다.(「작은 몸, 큰 고통」 중에서)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조세희와 난장이 시대의 특성 및 난장이 문학의 심연을 관류하는 정치적 무의식과 책임 윤리 등을 7가지로 정리하면서 우리의 ‘거듭 읽기’를 마치고자 한다.
첫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작가가 밝힌 것처럼 ‘난장이 체험’에서 비롯된 연작소설이다. 나도 난장이다, 우리도 난장이다, 라는 ‘난장이’ 의식을 바탕으로 난장이의 삶을 형상화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면서, 난장이처럼 신체적 경제적으로 취약한 프레카리아트들이 더 소망스러운 삶의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하게 희구한 문학이다.
둘째, 낙원구 행복동에 살던 난장이네 가족이 쫓겨나는 사건에서 상징적으로 웅변하듯이, 난장이와 같은 프레카리아트들은 생존의 터전을 점점 상실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터전 상실에 대한 불안감은 개인과 가족의 삶의 공간에서 지구촌 전체의 환경 문제에까지 걸쳐 있는 것인데, 그와 관련한 불안·불평등·불화의 감각이 역동적인 스타일로 형상화되어 있다.
셋째, 불평등이 만연한 현실에서 대립적 세계관에서 출발하되 그것을 넘어서는 상생의 지평을 희망처럼 모색한 문학이다. ‘작은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작은 공’의 세상을 지향하기 위해,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씨의 병과 같은 상징적 기제도 활용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지향하는 세계는 ‘뫼비우스 합창곡’이 울려 퍼질 것으로 상상된다.
넷째, 그런 뫼비우스 환상곡이라는 의미론을 추구하기 위해 작가 조세희는 스타일 면에서도 남달리 고뇌하고 공을 들였다. 단문의 절묘한 융합과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속(斷續)의 스타일, 창의 은유와 몰핑의 감각, 리얼리즘과 반리얼리즘 그리고 문학의 사회성과 미학성의 공동 생성 가능성 모색 등 조세희 특유의 ‘카오스모스 수사학’을 형성했다.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격렬하게 혼돈을 일으킴과 동시에, 혼돈과 혼란 속에서 나름의 질서를 찾아나가는 조세희의 카오스모스 수사학은 작가와 독자가 공동 생성하는 열린 텍스트의 가능성과 그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의미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다섯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시간 여행」과 『침묵의 뿌리』를 거치고 『하얀 저고리』에 이르는 조세희의 문학 역정의 심층에 흐르는 정치적 무의식은 평등이다. 4·19혁명 이후 한국문학의 핵심 주제가 자유 지향이었던 것과는 달리 조세희는 산업화된 공장 노동자 1세대들의 노동 환경과 의식 및 지향점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여섯째, 산업화 현실을 성찰하면서 조세희가 보인 생태학적 상상력과 환경주의도 주목에 값한다. 「기계 도시」 등에서 은강의 공장 지대 풍경 묘사와 사건 서사 과정에서 작가는 횡단-신체성의 감각을 통해 땅과 거주민이 공히 거주 불능의 위험에 처하게 됨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드러내면서 환경 정의를 지향한다. 몸과 생태계 사이의 ‘뫼비우스의 띠’를 상상하는 ‘환경적 신체’environmental bodies에 대한 감각도 웅숭깊다. 그리하여 땅과 사람, 지구와 지구인의 건강이 하나라는 ‘원헬스’One-Health의 비전을 추구하는 의료-환경인문학Medical-Environmental Humanities1)적 성찰의 가능성을 보인다. 나아가 생태학적 상호의존성과 지구 차원의 생태 공동체의 가치를 지향하는 생태-세계시민주의를 모색하고 지향한다.
1) Scott Slovic, Swarnalatha Rangarajan & Vidya Sarveswaran, ed., The Bloomsbury Handbook to the Medical-Environmental Humanities, London: Bloomsbury Academic, 2022.
일곱째, 작가 조세희의 ‘난장이 체험’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비롯되었다고 했다. 난장이 이야기는 돌봄의 정동과 공공 윤리를 환기한다. 경제적 이윤 확대와 소득 신장이 최우선이었던 1970년대였기에 돌봄의 패러다임은 아직 준비 이전의 단계였다. 그런 상황에서 난장이의 형상화를 통해 취약한 존재에 대한 돌봄의 가치를 환기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커테이Eva Feder Kittay 등이 논의하는 둘리아doulia의 의무2), 돌봄의 책임 윤리를 ‘사랑’으로 다함으로써 정녕 인간다운 세상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 난장이의 사랑의 윤리 및 조세희의 돌봄이라는 사랑의 노동 혹은 공공 윤리는, 1970년대 산업화 시대에 비교적 일찌감치 쏘아올린 의미 있는 ‘작은 공(共)’이자 ‘작은 공(公)’이었다.
2) Eva Feder Kittay, 『돌봄: 사랑의 노동』, 김희강·나상원 옮김, 박영사, 2016, p. 9.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