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를 마음에 담은 지 10년이 넘었고, 세 번째 짐을 싸는 나는 이미 30대 후반에 들어서 있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치즈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다 찾아서 보는 것이 목표였다. 호기롭게 다시 시작한 치즈 여행의 첫 지역은 스페인이었다. 어렵사리 만체고 치즈 농가를 찾아냈지만 언어 장벽으로 관찰자로 지켜보는 것 외에 더 깊은 정보를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고 뜨거운 7월, 영국으로 향했다.
--- p.10, 「그간의 치즈와 영국 치즈」 중에서
코벤트 가든의 가게와 마찬가지로 짙은 파란색 간판을 마주하자 너무 놀라서 잠시 멈칫했다. 그러지 않아도 시장에 들렀다가 찾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찾게 된 것이다. 버러 마켓에 있는 닐스 야드 데어리는 언뜻 보기에도 규모가 상당했다. 두 사람만 서 있어도 꽉 차던 코벤트 가든 매장과는 비교도 안 될 크기였다. 엄청나게 큰 재래시장과 그 앞의 치즈 가게. 여행 중 제일 먼저 찾아다니는 소중한 두 곳이 공존하는 장소에 툭 떨어진 것처럼 내가 서 있었다.
--- p.40, 「런던의 오랜 친구 ‘닐스야드 데어리’」 중에서
저절로 외마디 감탄사가 나왔다. 이런 광경을 마주할 때면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어서 선뜻 다가가지 못한 채 한동안 얼어 있기 일쑤였다. 그동안 찾아다녔던 여러 나라의 치즈 가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선반에는 커다란 덩어리 치즈가 아닌 한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작은 치즈가 가득 놓여 있었다. 전부 다른 종류의 치즈에 치즈마다 일일이 설명서를 붙여 놓았는데, 그 개수만 세어 봐도 족히 수백 개는 넘어 보였다.
--- p.72, 「작은 치즈 박물관 ‘리펀 치즈’」 중에서
치즈는 마치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발효되고 있는지 보여 주려는 듯 온몸에 곰팡이를 두껍게 피워 냈다. 곳곳에 영역을 확보하듯 치즈 위에 곰팡이가 그려 내는 선도 명확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기가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폭신폭신한 목화솜처럼 피어오른 곰팡이는 치즈를 감싸듯 덮어 발효 기간 중 최고의 모습이었고 그건 치즈에 사용하기엔 맞지 않는 자태라는 단어로도 부족한 모습이었다.
--- p.132, 「영국을 대표하는 블루 치즈 ‘스틸턴’」 중에서
치즈는 이곳에서 열흘을 머물며 ‘나 거의 다 익었어요’라고 말하듯 미미한 암모니아 냄새 속에 달달하게 익은 향을 뿜어냈다. 피어싱을 두 번 받은 몸통에는 완연한 갈색을 띠는 두꺼운 껍질이 덮여 표면이 나무처럼 거칠거칠하다. 색깔도 그렇고 단단함도 그렇고 누군가 통나무를 진열해 놨다고 속여도 믿을 만한 모습이다. 치즈 위아래 면은 몸통을 뒤집을 때마다 바닥에 닿아 곰팡이가 퍼져 나가는 속도가 조금 느렸는데 이제는 만져 보면 끈적임도 없이 건조한 곰팡이 가루가 묻어날 정도였다. 가장 발효가 취약했던 부분까지도 마침내 모두 끝난 것이다.
--- p.138, 「영국을 대표하는 블루 치즈 ‘스틸턴’」 중에서
이제 막 숙성실에 들어온 체더 치즈는 투명한 파라핀에 둘러싸인 것처럼 말간 하얀색이었다가 시간이 갈수록 모슬린에 얼룩덜룩 곰팡이를 피우기 시작한다. 숙성이 완성된 체더는 짙은 갈색을 띠는데 판매 전 모슬린을 벗겨서 내보내기도 한다. 라드가 마르면서 바짝 붙어 버린 모슬린을 떼어 내는 일 또한 만만찮은데 뜯어내는 동안 곰팡이 먼지가 작업장 가득 날린다. 하지만 오랜 숙성 기간 동안 묵직해진 퀴퀴한 모슬린을 벗어던지면 체더는 갈댓잎에서나 볼 수 있는 황금빛을 보여 준다. 거친 듯 강한 외모에 부드러움을 숨기고 있는 치즈, 체더의 본모습은 그랬다.
--- p.183, 「500년 전통의 퀵스 농장 치즈 ‘체더’」 중에서
치즈를 만드는 농가에서 우유는 곧 소의 관리로 시작되고, 계절에 따라 유축되는 우유 속 지방과 단백질의 비율이 달라지기에 그들은 소를 잘 먹이고 잘 키우는 데서부터 치즈 제조는 이미 시작된다고 했다. 그간 많은 전통 치즈 농가들을 다닐 때마다 농장 주인들이 나에게 그들의 치즈보다 그들의 소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먼저 보여 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퀵스 농장은 500년 동안 14대째 젖소를 키우는 곳으로 이들의 노고가 곧 전통 치즈를 지키는 근간이었다.
--- p.194, 「500년 전통의 퀵스 농장 치즈 ‘체더’」 중에서
주황색 염료는 하얀 우유에 닿자마자 여러 갈래로 뻗어 가더니 대리석 무늬를 그려 냈다. 우유의 깊은 속까지 색이 잘 물들게 저어 주자 이내 우유 전체가 옅은 주홍빛을 띠었다. 염색제를 넣었을 때의 우유를 상상해 보기는 했지만, 실제 주홍빛으로 물든 우유는 낯설었다. 크롭웰 비숍에서 스틸턴 치즈를 만들 때도 우유에 푸른 액체를 넣긴 했다. 하지만 그건 색소가 아니라 곰팡이균이었기 때문에 푸른색은 번지다가도 곧 우유에 흡수되었다. 물론 우유의 색도 변하지 않았다.
--- p.214, 「레스터의 붉은 치즈 '레드 레스터'」 중에서
정말이지 치즈 만드는 일은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농장을 찾아다니며 매번 느끼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노동의 무게가 느껴질 정도다. 작업자들은 저 일을 어떻게 매일 하고 사나 싶을 때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지칠 시간이 되면 작업장은 되레 더 시끄러워진다.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웃음을 터뜨리고, 그 결에 힘을 얻어 다시 작업에 집중하고 그리고 다음 날에도 그렇게 작업을 시작하곤 했다.
--- p.223, 「레스터의 붉은 치즈 '레드 레스터'」 중에서
13세기부터 영국 중북부 농가에서 만들어 오던 랭커셔 치즈는 가장 독특한 영국 치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나흘을 묵힌 커드로 만든 치즈이기 때문이다. 농장에서 짜낸 하루치 우유를 치즈 제조에만 썼다면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마시거나 빵을 만드는 데 쓰거나 시장에 내다 팔고 나면 남는 우유의 양은 많지 않았다. 때문에 일단 커드로 만들어 놓고 치즈 제조하기에 충분한 양이 될 때까지 사흘이고 나흘이고 모으는 것이다.
--- p.240, 「가장 독특한 영국 치즈 '랭커셔'」 중에서
게리가 치즈 숙성실에 들어가 곰팡이 덮인 치즈 스무 개를 들고 나오더니 난데없이 수돗가로 갔다. 그러고는 물을 콸콸 틀어 놓고 억센 솔로 치즈 표면을 박박 닦아 내는 게 아닌가! 치즈는 곰팡이를 피워 내며 발효를 하는데, 발효 과정 내내 농장에서는 치즈 표면의 곰팡이와 치즈 진드기를 마른 솔로 털어 내거나 진공청소기 혹은 에어건 등으로 제거한다. 그러나 발효가 끝나고 숙성 중인 치즈를, 그것도 물에 닦아 내는 건 처음 본 광경이었다. 어찌나 당혹스럽던지 치즈가 아닌 내가 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 p.286, 「지방 비율이 이름인 치즈 ‘글로스터’」 중에서
치즈가 어느 깊이만큼 손상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제이미는 치즈 와이어를 이용해 전체를 절반으로 잘랐다가 4분의 1, 다시 16분의 1로 잘라 냈다. 처음 자른 치즈는 윗부분의 표면 근처만 조금 손상된 정도였지만, 두 번째 치즈를 반으로 가르자 치즈 진드기가 만들어 놓은 작은 굴이 보였다. 치즈 진드기가 잘 익은 체더 치즈 하나를 통째로 망쳐버렸다. 아무리 손상된 부분을 잘라 조각으로 판매한들 제값을 받을 리가 없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작은 벌레들 때문에 한 해에 수천만 원쯤이 우습게 날아가는 것이었다.
--- p.315, 「체더의 슈퍼스타 치즈 '몽고메리'」 중에서